장강칼럼 - 최일중(성균관 전인)
상태바
장강칼럼 - 최일중(성균관 전인)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7.01.23 12: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유(丁酉)년 새날의 새 희망(希望)을

희망찬 정유년 붉은 닭의 울음소리와 풍성한 기쁨을 주는 새 기운 새 희망의 태양으로 힘차게 시작되었다. 시작은 언제나 설레는 희망을 꿈꾸게 한다.

정조다레를 지낸다. 설빔 집안 어른께 세배 및 성묘를 한다. 섣달 그믐날 또는 초하루 새벽에 복(福)조리를 삼매 세 마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여 삼재(三災)를 면한다.

설날 밤 마루나 뜰에 체를 걸어 야광귀(夜光鬼)를 쫓은다. 입춘대길 입면을 붙인다. 널뛰기는 부녀자들이 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없이 한다. 연날리기를 청소년들이 1,2월부터 하는 곳도 있다. 저녁에 횃불놀이를 청소년들이 패를 지어서 횃불 싸움을 한다.

대보름날 밤에 남녀노소가 다릿병을 앓지 않기 위해 다리를 밟은다. 어부들이 출항을 금한다. 농가에서는 샘물을 긷지 않고 어촌에서도 물을 긷지 않은다. 남자가 먼저 일어나 부엌 마당의 네 귀를 쓸고 부엌에 먼저 들어간다.

상원(上元)을 전후하여 고를 만들어 마을 대항전을 한다. 상원자정에 어촌에서 배생이 배(模型船모형선)를 바다에 뛰우는 놀이를 한다. 설날아침에는 조상을 모신다.

먼 옛날 원시적인 생활을 할 때 천재지변이나 사나운 맹수들의 공격과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받기위한 수단으로 하늘과 땅, 심수(深水), 거목(巨木), 높은 산, 바다, 조상 등에게 절차를 갖추어 빌었던 것이 제사(祭祀)의 발생 근원이다.

이같이 인간이 자연변화나 어떤 공격 체 또는 질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져 오던 제사는 중세와 근세에 이르러 차츰 유교적인 조상숭배의 제도로 변하게 되었다.

제사는 망자(亡者)에게 음식을 드리는 의례이고 차례는 조상에게 차를 드리는 의례였다. 좋고 귀하고 맛있는 음식은 먼저 조상에게 드리고 생자(生者)들은 어른부터 들게 한 다음 먹는 것이 한국인의 고유한 관습과 전통 미풍양속이었다.

먼저 제사의 의미는 한자로 풀이하면 제(祭)자는 또우(又)와 왼쪽글자 고기육(肉)의 합자를 신(神)에게 바치고 있는 고기와 술을 손으로 뿌려 깨끗이 하고 있는 모양을 나타내며 보일시(示)와 뱀 사(巳)가 합하여 신(神)이 뱀을 잡아 죄(罪)을 없게 해주는 것이 바로 제사의 의미이다.

한마디로 죄 사함을 받기위해 신과의 접촉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 차례도 그런 여유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옛날에는 차가 귀하고 값이 비싸서 절대 다수의 서민들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서민들은 차대신 술을 드리기도 하다가 명절의 의미로 바뀌면서 차례 상을 햇곡식으로 준비한 음식과 송편, 떡국 밥을 진설하기 시작하여 제사는 밤에 드리는 밤 제사, 차례는 낮에 드리는 낮 제사로 정착하게 되었다.

제사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리의 고유한 미풍양속으로 알고 있지만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외래문화이다. 제사는 중국에서 공자이전에 하나라와 상나라 때 처음으로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당시 제사는 지금처럼 죽은자에 대한 제사가 아니고 살아있는 자에 대한 제사였다. 종손은 높은 곳에 앉혀놓고 제사 형식의 예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생존해 있는 황제에게만 제사를 지냈다. 중국 진나라 예서에 의하면 제왕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며 사대부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평민들이 “저의 부모만 훌륭하냐. 우리 부모도 훌륭하다.”고 반발하면서 자신들의 신분을 높이기 위해 제사를 지내게 되면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창기에는 땅에게만 제사를 지냈고 고려말기에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사당을 지어 신주를 모셔놓고 특별한 사람에게만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성계가 유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했기 때문에 글 정권이 정통성을 갖지 못하여 민심이 돌아 서자왕의 정권을 인정받기 위한 방안으로 무학대사가 “효를 중요시 하는 백성들의 효도 심을 이용하여 조상제사를 장려하면 백성들이 왕의 정권을 인정할 것이다.”하고 조언하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백성들에게 장려하게 되었다.

인간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효를 계속하기 위함이며 효란 자기 존재에 대한 보답이기에 인간의 온갖 행실 중에서도 가장 근원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모심을 지극히 했다. 옛 현인들은 “살아 계신 조상은 극진히 받들면서 그 조상이 돌아가셨다고 박하게 한다면 옳지 못한 일이다.”라고 했다.

진실로 자기존재를 고맙게 여기는 사람은 조상 섬기기를 조상 모시 듯 해야 하는 것이다(사사여사생 事死如事生). 그러므로 죽은 조상 섬기는 제 의례를 효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효는 조상이 살아계신 동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제례는 우상 숭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상은 돌이나 나무 쇠붙이 따위로 형상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고 숭배는 종교적 행위에 속한다. 영정사진과 지방(망자 이름을 기재한 종이)이 우상일 수 없고 제례는 망자에게 감사와 공경을 드리는 의례를 표하는 것이기에 종교와 관련 있는 숭배가 될 수 없다. 제사 때는 평소 흩어져 있던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정성이라는 하나 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조상님께 예를 올리고 돌아가신 분을 흠모하는 날이다.

이 날은 한 조상아래 혈연이 모여 화합과 우애를 다지는 시간이며 우리 땅에서 나오는 오곡백과를 차려 감사의 마음을 올리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란 자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뿌리를 느끼며 가문의 전통성과 정신을 배우게 된다.

제사를 통하여 나와 부모님 할아버지와 할머니, 조상과의 맥을 인지하게 되어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가문의 구심점을 알게 되며 태어난 의미를 지각하게 된다. 제사는 가족집단간의 연결고리이고 정치적 네트워크이다. 제사를 빌미로 한 가족 구성원의 모임체이며 효의 연장선이고 친족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의식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관계의 시작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나-가족-친족-인족 이런 것들이 혈통이나 가문을 만든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제사란 나의 직계조상이나 고인의 기일에 맞추어 가족들이 모여서 고인이 살아생전에 자손들에게 베풀어주신 유무형의 훌륭한 업적을 되새겨서 자라나는 나의 자손에게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달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가문의 영광이요. 혈통의 자랑이다.

제사를 통해서 조상과 나 자손의 연결고리를 형성하므로 인해 발생되는 긍정적인 효과는 실로 대단하다. 화목한 가족관계를 형성하는 기본이며 나아가 친인척 마을 공동체의식으로부터 애향심 애국심의 근간이 된다. 우리 민족은 지연, 혈연, 학연 등의 연결고리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서양의 개인주의와 차별되는 것이다. 제사는 한국적인 것으로 유교가 중국에서 발생했지만 21세기 지금에는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서양의 석학들이 한국의 유교이념을 배워가는 이유이며 제사는 조상신에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들 딸 후손에게 내 조상을 존경하는 모습을 체험적으로 보여주므로 인하여 장차 나의 후손이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가는 의식이다.

제사와 다례를 통하여 평상시 떨어져 지내던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동질감을 느끼는 계기가 되며 조상과 끊어진 마음을 통하여 나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해야한다. 제사는 꼭 지내야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