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최일중(성균관 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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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칼럼 - 최일중(성균관 전인)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6.10.0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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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명상 瞑想)한다

하루를 살면서도 가끔씩 멈춰서 자신의 생각 정서 행동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하면서 얽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관조해보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올곧게 받아들여 살아가고 있는가? 라고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래서 자신이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이 떠오르면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좋다 나쁘다 이래야한다 저래야 한다고 절대로 판단하지도 말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들에 어떤 분별의식을 가하지도 말라. 단지 일어나는 것들을 그냥 바라보기만하라. 그러면 어떤 신념과 두려움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두어 두고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압권하고 있던 불안한 두려움은 스스로 힘을 잃고 사라져 갈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하다보면 우리는 오랜 습관에 얽매인 자기 판단으로 불안과 불만족 속으로 스스로 자신을 가두어 버리는데 익숙해 있음을 자연히 깨닫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습득한 지식정보나 체험에서 굳어진 내면의 신념에 집착하려는 습성 때문에 매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옥죄면서 귀중한 삶을 낭비하고 있다. 우리 삶에서 가장 큰 비극은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에도 자기 내면에서 신념으로 굳어진 어떤 믿음과 두려움에 얽매여 타고난 권리인 자유의 평화에 접근하지 못하고 괴로움에 찌든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음이다. 이런 사실을 충분히 체험하면서 주어진 행복한 삶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다는 인식을 제대로 느끼지 않는 한 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행복한 가능성을 즐길 수가 없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가 형성한 신념과 두려움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고 있음을 깨우치게 되면 자신을 옥죄고 있는 자기 우리에서 스스로 갇혀 버린 감방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은 자신의 살에서 경험하는 모든 순간순간들을 깨어 있는 의식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를 절대로 수용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절대수용이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매순간 판단하거나 통제하거나 회피하거나 참고 견뎌내려고 하지 않고 단지 현재 순간 경험되어지는 그대로를 의식하고 바라보기만 함으로써 저항 없이 고통과 슬픔을 느끼기만 하는 내면과정을 의미한다. 절대수용은 마주하는 어떤 상황에 대해 자기내면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분명히 인식하되 이에 끌려서 좋고 싫음 옳고 그름과 같은 자신의 바람으로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부분을 억제하고 있다거나 느낌의 어떤 부분에 마음을 닫고 있다면 호불호의 경지를 지속시키려는 두려움과 분리의 느낌을 부채질하게 되므로 절대수용이 이루어지면 이미 내면화된 신념으로 조건화된 반응에 역행하게 되므로 판단 분별의 근원적 기반을 직접 해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처럼 긴장감을 일으키는 어떤 일을 당하게 되면 근육 뿐 만아니라 마음까지도 반사적으로 위축받게 된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지 후유증은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 누구의 과실이 더 큰지 등에 주의력을 집중하게 되면서 긴장한 자신에게 저항하는 조건화된 반응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절대수용을 하게 되면 자신의 판단에 의해 조건화된 반응인 고통을 증폭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과거를 재탕하고 미래를 기대하려는 의식 때문에 길을 잃고 지금 이 순간의 살아 있는 경험들을 버려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통해 실제 경험과의 접촉을 끊어 버린다. 이처럼 우리는 오랜 습관에 얽매인 협소한 자기 판단을 지켜 내려는 내면의 의지에 스스로를 가두는데 익숙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와 평화라는 타고난 권리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러니 불안과 불만족속으로 자신을 스스로 속박함으로써 피곤으로 찌든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귀중한 삶을 소비하는 고달픔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절대수용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순간들을 통제하거나 판단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의식하기만 하는 것이 이를 참고 견뎌내라는 것이 아니라 절대수용은 슬픔이나 고통을 저항 없이 느끼는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슬픔과 고통에 따른 행동에 대해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은 내면과정을 실제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황에 따라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바라만 보고 있음이 절대수용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부분을 억제하거나 마음을 닫고 추론하기를 지속한다면 진솔한 자아와 분리하고 있다는 느낌들을 부채질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기 위해 명상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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