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14일 오후 5시.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이 가결됐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국회 의사당 앞 사거리에는 환희와 안도의 함성이 쏟아졌다.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부터 갓 스물을 넘겼을 앳된 여학생들까지 탄핵 시위를 위해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약속한 듯 노래 한 곡을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이라는 가사로 더욱 유명한 노래. 다름 아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응원봉처럼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진 청춘들이 한목소리가 되어 이끄는 노래는 거대한 울림이 되어 그날의 광장을 가득 채웠다. 바야흐로, 민주주의 세대교체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시작은 12월 3일이었다. 밤 10시 29분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심야 긴급 담화를 열고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유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지켜내겠다"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 장갑차가 출몰하고,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칫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 그러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모여든 국민들은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서고 담을 넘어 국회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의원들에게 등을 내어주며 시간을 벌었다. 계엄군이 주춤한 사이 의원들이 속속 모였고, 참석 의원 190명 전원 찬성으로 비상계엄령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기록될 ‘2024년 12월 3일 서울의 밤’은 그렇게 약 150분여 만에 끝날 수 있었다.
피로 이룬 민주주의가 군화발에 짓밟힐 수 있음에 분노한 국민들은 매서운 칼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시위의 물결은 또다시 대한민국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마치 새로운 인류의 등장처럼 그들이 등장했다. 케이팝과 응원봉으로 중무장한 2030 세대는 마치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시위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며 노래로 또 함성으로 지친 우리를 독려하고 일으켜 세웠다.
2차 계엄이 선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국회 앞을 지키던 그 순간에도, 국민의 힘 의원들이 표결 직전 단체 퇴장해 탄핵소추안이 부결되던 그 순간에도, 변함없이 빛나는 다채로운 빛깔의 응원봉 물결은 반짝이는 눈동자처럼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품은 청춘들은 비폭력적 항거이자 아름다운 연대를 이어나가며 그렇게 어둠 속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왜 응원봉이냐고 묻는 기성세대들에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가장 소중하고 빛나는 물건이기에 기꺼이 들고나왔다고 답한다. 또 오색 빛깔 응원봉이 이룬 빛의 군집이 각자의 위치에서 다른 색깔로 목소리를 내지만 결국은 하나를 이루는 민주주의와 닮았다고 말한다.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와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 참사를 겪으며 성장한 그들은 더 이상 지켜줘야 할 어리고 약한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내며 민주주의의 새로운 표상이 되고 있다.
이들과 더불어 시위는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유수의 외신들은 앞다퉈 케이팝 응원봉 시위에 대해 조명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희망’, ‘비폭력·연대의 상징’, ‘콘서트 같은 새 시위 문화’라는 표현들로 한국의 시위문화에 감탄을 드러냈다. 중고 직거래 사이트에는 시위에 참여하기 위한 응원봉 사고팔기가 활발해졌으며 다수의 국회의원들 또한 SNS 게시글을 통해 응원봉 시위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알렸다. 일명 ‘탄핵송 플리’라 불리는 시위 현장의 케이팝 플레이리스트가 유행처럼 공유되고, 5060 세대들은 시위에 나가 부르기 위해 케이팝을 예습하며 가사를 외우기도 했다.
그 열망과 진정성은 또 다른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졌다.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응원하기 위해 국회 근처 카페나 음식점에 선결제를 하는 사람들부터 자비로 산 핫팩 수천 개를 들고나와 나눠주는 사람들, 키즈버스를 대여해 시위에 참여한 어린이들의 쉼터를 마련해 주는 사람들까지 일사불란하게 서로가 서로의 힘이 돼 주었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12월 14일 오후 5시. 12·3 비상계엄으로 발발된 무력(武力)은 마침내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무력화(無力化)되었다.
한강 작가가 말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들이 산자를 구하는 숭고한 운명의 연결고리를 우리는 직접 목도하였다. 12월의 여의도가 5월의 광주를 껴안고, 2024년의 응원봉이 2016년의 촛불을 껴안으며 하나가 되는 벅찬 감격의 순간들, 그 안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무궁한 성장의 자양분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여전히 청춘인 민주주의와 더불어 우리는 사유화된 권력과 반헌법적 폭거를 이기고 다시 한번 승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