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강진 경회 김영근 선생의 편액이 장흥 창랑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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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강진 경회 김영근 선생의 편액이 장흥 창랑정에 있다.
  • 장강뉴스
  • 승인 2023.05.1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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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문병길 회장
문병길 회장

◆경회 김영근 선생

경회 김영근(景晦 金永根,1865~1934)은 김해김씨 송정파이다. 중조 김승원(1596~1658)은 지금의 해남 송지면 죽도촌에 터를 잡았고 손자 김철공(1648~1713)대에 완도 군외면을 거쳐 5대 후손 김진태(1733~1806)는 강진으로 들어와 송정파 파조가 되었다.

9대 후손 심어당 김도순(1820~1886)은 경회 김영근의 부친으로 강진읍 목리 초지마을에 살았고 1873년 진도 금갑진 만호(종6품직) 임기를 마치고 칠량면 명주리 명동마을에서 정착했다.

김영근 선생은 14세부터 오남 김한섭(1838~1894)선생에게 강진 한천정사와 봉양정사에서 학문을 베웠으며, 조선후기의 격동기와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조선의 선비였다.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의 학맥을 계승하였고, 평생을‘위정척사’와‘항일호국’의 정신 속에서 살면서 향리 강진을 비롯한 인근 장흥의 인사들과 교유를 많이 했는데 장흥 지역은 관산쪽 인물과 교유했다.

동문수학했던 위계두(1876~1934)의 경우 1930년~1934년에 여러 차례 서간문이 오고갔다.『경회집』에 글이 있는 장흥인들은 40여명이다.

※자료출처:인지의 즐거움 183 (2019년, 김희태)

◆ 장흥 창랑정(滄浪亭)

○ 소재지: 전남 장흥군 장흥읍 기양연산길 (연산리40번지)

○ 문화재지정: 장흥군 향토문화유산 제17호

○ 연혁

창랑정은 장흥읍 연산마을(박림소 윗쪽)로 가는 높은 언덕에 위치 하면서 탐진강(장흥 예양강)을 굽어보고 있다.

정자 전면의 장흥읍 북쪽에 펼쳐져 있는 부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등 전망이 뛰어난다. 정자는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 아래편에 관리사 1동이 자리하고 있다.

창랑정 안의 상량문에 의하면 1918년 길행식(1893~1957)이 풍영소(風詠所)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했다고 적혀 있다.

이후 정자는 길행식과 그의 후손들이 사용하다가 1946년 문중에 헌납되어 총회 및 풍영소로 쓰였으며 몇 차례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2008년 후손들이 창랑정을 장흥군에 기탁하여 장흥군에서 중수해 군민들의 휴식 공간 및 문학단체의 모임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정자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으로 1단의 낮은 기단위에 잘 다듬은 주초위에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포가 없는 민도리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중앙으로는 앞뒤 툇마루 사이에 방을 설치하고 그 다음 뒤쪽으로다시 방 1칸을 두고 앞쪽으로는 대청보다 1자반정도 높게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정자 안에는 창랑정 상량문을 포함하여 6개 편액이 전한다.

◆ 경회 김영근 선생의 편액

창랑정에 김영근 선생의 창량정 상량문,題 창랑정, 창랑정 소인(小引)의 3개 편액이 있는데 창랑정 소인(小引)은 아래와 같다.

장흥 박림소 언덕에 정자 창랑정은 해평인 길행식이 건립하였다. 나는 길군(吉君:길행식)에게는 인척이 되니 이에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

무릇 좋은 곳을 가려 정자를 건립하고 때로 유람하고 휴식을 취하여 피로와 안일을 조절하는 것은 옛 사람들이 숭상한 바이다.

세상 사람들이 집을 높고 크게 하고, 담장을 장식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다 바라는 바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의미를 두고 일을 벌이지 않기로 하니, 길군은 나이가 겨우 30세뿐인데 능히 여기에 미치니, 안락한 생활과 부귀에 빠져 미혹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자와 비교하면 훨씬 나은 편이다.

그러나 사물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리이다. 옛날에 안평중(晏平仲. ? ~ BC.500 춘추시대 제나라 명재상)은 여우 가죽옷 하나로 30년을 보냈는데, 제나라 선비들 중에는 안평중을 의지하여 취사한자가 72명이었다.

근래 장흥에 김찬석(金璨錫)참봉이 있는데, 그 선조 되는 사람을 위하여 묘표(墓表), 묘지문, 묘비문, 묘갈명부터 모각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쏟지 않음이 없는데, 전 후 10년 동안 다른 일에는 겨를이 없었다. 이는 길군에 있어서는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할 바를 알아야 할 일이다.

강산이 빼어나고 구름과 노을이 변화하여 물고기와 새가 배회하고 손님과 벗들이 즐거워한 즉 나는 비록 글재주는 없으나 다른 날에 오히려 길군을 위하여 노래를 지어 창랑가를 이르리라

1921년 6월 김영근 쓰다.

※자료출처: 문림의 향기Ⅰ(2016년, 장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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