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최사전은 고려 인종왕비 장흥임(任)씨를 추천했다(上)
상태바
특별기고 - 최사전은 고려 인종왕비 장흥임(任)씨를 추천했다(上)
  • 장강뉴스
  • 승인 2023.05.01 1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고려왕들의 외갓집 정안사 주변 관광지 조성-

문병길 회장
문병길 회장

◆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사전

최사전(1067~1139)은 탐진최씨 시조(始祖)이다.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을 제거한 공적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문하시랑 평장사(장관직)관직에 올랐다.

이자겸의 난으로 고려 종사가 풍전등화와 같은 멸망의 위기에 있었을 때 훌륭한 묘책으로 고려를 구출해낸 공을 인정받아 인종 왕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았다.

매년 음력 10월15일 강덕사(강진군 군동면 라천리)에서 주벽으로 향사해오고 있다.

이자겸의 난을 최사전 묘갈명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때는 외척(外戚)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정치와 명령이 사사로이 선포되니 그 악함이 중외를 덮었다. 일국지민(一國之民)부터 부인소자(婦人小子)까지 머리를 붙잡고 아파하였다.”

또한, 이자겸이 독이 든 차를 전달하려 했다며 이자겸의 행위를 비난했다. 이 사태를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던 인종 임금은 결국 폭발하여 선제공격을 하게 되었다.

이자겸은 본인이 문(文)을 차지하고 무(武)를 차지한 척준경과 사돈을 맺고 연합하여 정권, 군권을 독점한 상태였다. 자신의 외손자 임종 왕이 반발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겸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우선 사태를 바라보기만 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인종의 신하들이 척준경의 아들과 척준경의 동생을 죽였다.

소식을 듣고 극도로 분노한 척준경은 미쳐 날뛰었고, 결국엔 궁궐 만월대를 불태웠다.

◆ 인종 임금에게 간언했던 최사전

궁궐 만월대 화재는 그 누구도 상상을 못한 일이었고 인종은 큰 충격을 받아 후원에서 조서를 작성, 이자겸에게 양위하고자 했다. 최사전은 인종이 정말로 양위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고 간언했다.

“삼한(三韓)이라는 것은 삼한의 삼한(三韓之三韓)이니, 폐하의 삼한(陛下之三韓)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군(先君)이신 태조(太祖)께서 근로하셨기에 (삼한이) 이렇게 완전해진 것인데, 부디 멈춰주십시오.“

임금께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시길 '넌(汝) 생사와 육골을 되돌릴 수 있는가? (자료출처: 최사전 묘갈명 중에서 발췌)

이자겸의 거절로 왕위의 양위파동이 일단락 된 뒤, 인종은 이자겸의 자택에 갇혔다.

최사전은 은밀히 인종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다.

"이자겸이 날뛸 수 있던 이유는 척준경에게 붙었기 때문입니다.

척준경을 얻으시면 국방의 병권이 회수되고, 이자겸은 홀로 남게 될 것입니다."

왕이 말하길 "척준경은 국공(國公)과 한마음이니, 사돈 관계까지 맺었다. 심지어 동생 척준신(俊臣)과 아들 척순(純)이 모두 관병(官兵)에게 살해당했으니 의심스러울 뿐이다."

인종은 생각 끝에 최사전의 말에 일리가 있다 여겼고, 척준경에게 귀금속, 명마 등을 보냈다.

이후 척준경과 이자겸은 만월대 궁궐을 태워 먹은 것 때문에 조금씩 사이가 벌어졌고, 인종은 이 틈을 타 척준경에게 조서를 선물한다. 최사전은 조서를 들고 척준경에게 가서 전달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조(太祖)와 열성(列聖)의 신령이 하늘에 계시니, 화복(禍福)을 두려워 해야하오. 이자겸이 자기의 패거리를 믿고 권세를 부리니 신의가 없어 같이 호악(好惡)을 논할 수가 없소.

공(公)께선 일심으로 봉국(奉國)하시어 영원히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을 공(功)을 세우소서.

결국 척준경은 인종 임금에게 머리를 숙이기로 결심하고, 인종의 지시를 따라 이자겸을 체포했다.

◆ 최사전은 인종 왕비를 추천했다.

고려 인종 왕비 간택은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공예태후 임(任)씨가 1126년에 연덕궁 주인으로 입궁했으며 장흥임(任)씨가 인종 왕비로 간택된 것은 당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이자겸이 왕비를 시켜 인종 왕을 독살하려다 실패하자 반역을 도모한 난을 일으키게 되었고, 고려 17대 인종 임금은 최사전, 척준경 등으로 하여금 반란을 평정하게 하고 이자겸을 영광으로 귀양 보내고 이자겸의 딸 왕비 2명을 폐출시켰다.

당시 궁궐의사(內醫)였던 최사전은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일등공신이 되었고, 후에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던 인물로 당시 탐진현(현재 강진군)출신이다.

최사전은 이자겸이 권세를 남용하자 인종 임금과 협의하여 이자겸의 심복 척준경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제거할 계획을 논의할 수 있는 측근 신하였던 임원후의 딸을 연덕궁주로 추천했다는 기록이 있어 어떤 형태로든 장흥임(任)씨를 왕비로 간택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자겸의 난까지 경험한 인종 왕은 왕비를 간택하는데 최우선적으로 이자겸 같은 외척이 나오지 않기 위해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명문귀족 집안이면서 국모로서 덕망을 갖춘 여자를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예태후 임(任)씨 그 당시 집안을 살펴보면 할아버지 임의(任懿)는 여섯 임금(문종, 순종, 선종, 현종, 숙종, 예종)을 보좌하는 관직에 몸담아온 청렴한 명신으로 평장사(장관직)와 문하시중(수상직)에 오른 명문가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임원후는 훗날 평장사, 문하시중에 올랐지만 당시에는 진중내급사(종6품)관리였고 숙부 임원준은 원외랑직에 있다 유배당한 상태였다.

그래서 왕실의 외척이 되더라도 그들의 세도문제가 크게 우려되지 않았으며 가장 신뢰한 최사전 추천으로 이자겸의 인주이씨 몰락한 이후 장흥임(任)씨 왕비간택은 이처럼 치밀한 정치적인 전제된 것이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