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억추 장군, 명량해전 대승을 이끈 일등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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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억추 장군, 명량해전 대승을 이끈 일등공신
  • 장강뉴스
  • 승인 2023.04.0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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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문병길 회장
문병길 회장

‘정유재란 때 김억추 장군, 폐선을 전함으로, 울돌목 명량해전에서 철쇄 사용’ 대승

◆김억추 장군을 매년 4월 28일 배향

금강사(錦江祠)는 강진군 강진읍 영파리13(효자길 38-24)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제91호이다.

이순신 장군의 탄생일인 4월 28일 김억추 장군의 후손 청주김씨들이 모여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을 추향하고 그의 휘하에서 활약한 강진출신 김억추(1548∼1618)의 덕행과 충의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김억추 장군은 강진출신으로 강진 금곡사에서 무술을 연마해 선조 11년(1578년) 과거시험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전라도 방어사로 진주에서 열린 이순신의 작전회의에 참여하여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끄는데 커다란 공을 세워 이후에 경상좌병사, 제주목사가 되었다.

1594년 만포진 첨절제사(종3품)가 되고, 이어 진주목사· 고령진 첨절제사를 지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정3품)가 되어 이순신을 따라 어란포해전과 명량해전에서 승전한 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됐다.

◆김억추 전라우수사는 정유재란 때 전선을 수습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장흥군 회진면에 있는 회령진성(전라남도 문화재 제144호)에서 정유재란인 1597년 8월18일(음력) 취임식을 마치고 전라우수사 김억추에게 명령하여 전선부터 수습해 수리 정비하게 하였다.

당시 남아있는 전선(판옥선)이란 칠천량 해전에서 패주(도망)한 경상우수사 배설이가 이끌고 온 8척과 녹도만호(종4품직)군선 1척뿐이었다.

장흥출신 조선병참 김세호 감독관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온 8척 전선을 직접 도끼를 이용하여 인근 해안주민 300여명 함께 밤낮없이 전선을 전함으로 개조했던 곳은 당시 장흥도호부 내덕도 해안(현재 장흥군 회진면 덕산마을 땅재 끝)이었다.

그런데 진도대교 근처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지에 ‘폐선을 명량의 전함으로’라는 조형물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폐선(廢船)을 명량의 전함으로

칠천량 패전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선은 부서진 판옥선 9척뿐이었고 엄청난 왜군 함대는 전라도 해역에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온전한 전선이 없어 해전이 불가능했던 이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마침내 명량해전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김세호, 정충량 등과 함께 전쟁 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은 이들이 바로 저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이었다.

◆울돌목 명량해전에서 철쇄(철사를 엮은 철줄) 사용

충무공 이순신은 철쇄를 전투에 사용했다. 수중 철쇄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대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일본 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333척의 일본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넘어져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일본 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전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하게 변하자 수군이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완전히 섬멸했다.

이 쇠사슬은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 실기》에 “철쇄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는 기록에서 유래한 것이다.

실제로 20세기 초 일본의 연구문헌에 의해서도 '명량해전에서 10여척만 도망했는데 실제로 당시 조선해군의 함포에 의해서 침몰한 함선보다 조류와 철쇄(철사를 엮은 철줄)에 의해 파괴된 함선이 더 많았음이 확실하다' 라고 하고 있다.

◆남기고 싶은 말

우선 장흥 회진 앞바다에서 수습했던 전선 8척을 내덕도(현재 장흥군 회진면덕산마을)에서 전함으로 정비했던 그 당시 조선병창이 있었던 곳에 ‘폐선(廢船)을 명량의 전함으로’ 라는 조형물이나 표지석을 세워 장소 마케팅하고, 학술용역사업을 추진하여 가칭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관련 유적지를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전라우수사 김억추 《현무공 실기》에 “철쇄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는 기록을 학술용역사업 추진하여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철쇄를 걸어놓고 일본 수군을 기다려서 명량해전에서 승전했다는 상황을 재조명해야 한다.

또한, 장흥 회령진성(전라남도 문화재 제144호)에 이순신 장군을 따랐던 이름 없는 민초들의 호국영령을 달래기 위해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는 ‘무명용사의 백비(白碑)’를 건립해야 한다.

참고적으로 ‘폐선을 명량의 전함으로’라는 조형물이나 표지석, ‘무명용사의 백비’를 설치할 때 음력 8월 19일을 선택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1597년 8월 19일(음력) 충무공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받아 취임식을 장흥 회령진성에서 거행했고 전라우수사 김억추(장흥도호부사 역임)에게 배설이가 이끌고 온 전선을 전함으로 고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폐선을 전함으로 고쳤던 곳 당시 조선병창이 있었던 주변이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들판으로 변했지만 스토리텔링 하여 장흥 회령진성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해설해주면 그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쉽게 기억할 수 있어 방문객이 다른 사람에게 홍보해서 또 다른 관광객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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