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모두가 내 탓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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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칼럼 - 모두가 내 탓이요
  • 장강뉴스
  • 승인 2022.03.18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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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중 논설위원

불치원장도후회(不治垣墻盜後悔), 담장을 고치지 않으면 도적 맞는 후에 뉘우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최일중
최일중

가난도 내 탓이요. 아픈 것도 나의, 부덕의 소치라는 말은 옛 선현들이 고매한 인품과 책임감에서 나온 말이다.

정치인은 상대방 탓, 목수는 연장 탓, 농군은 지게 탓만 하면 이는 변명만 하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소인배임에 틀림이 없다. 모든 것은 자기 탓이라고 한다.

반성이란 자신의 언행이나 생각에 대하여 그 잘못이나 옳고 그름, 따위를 스스로 돌이켜 생각함이다. 성취감에 날뛰다가 낙상의 고배를 마시게 되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배려와 베품 인내와 책임 창의적인 노력 헌신과 희생은 시시콜콜 필부(匹夫)의 변명으로 치부해 버리니 답답할 따름이다.

인간이란 만물의 영장이지만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삶을 영위하기에 선의의 경쟁이 있어야 발전하게 된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식을 함양해 가르치고 핀잔도 하면서 인고의 세월 헤쳐 나가야만 한 인간으로 성장발전 하게 된다는 것은 평범한 진리를 외면한 삭막한 현실...

자본주의 시대가 급진적으로 발전해 풍요로운 삶이 전개된다 해도 인간의 도리를 지켜가면서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경지가 아닐까.

이기주의가 독버섯처럼 자라나 주의를 망각하고 제일 즉 일등이면 된다는 치졸함,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졸부의 심통으로 남을 헐뜯고 짓밟아 버리는 작태를 볼 때 걱정이 앞선다.

옛말에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은 자아(自我)를 망각하고 의타심이 많은 괴변임에 틀림 없다.

군주(君主) 즉 치자(治者)는 백성을 위해 무한의 아끼지 않아야 되는데 정치 경제가 실종되어 실업자가 많아 사람살기 팍팍하고 물가로 인한 빈부의 격차가 심해서 서민들의 삶이 파탄에 이르고 있는데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국정 책임자들은 모두가 남의 탓만 하고 있으니 책임감과 진정성이 실종된 지 오래다.

전쟁의 위기에는 용장이 평시에는 덕장(德長)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는 지혜롭게 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희생 속에서 발전한 현실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으로 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약을 위해 고심초사 한 결과다.

내편 네편으로 갈라서 정적(政敵)으로 매도하고 비방과 모략을 일삼고 편법으로 매사를 추진한다면 억울함이 싹트고 분노가 쌓여 불신이 확산 된다는 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

행정가는 행정인으로 정치가는 정치인으로 본 분을 잃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맡은바 직분을 성실히 이행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더 행복한 나라 살기 좋은 국가 함께하는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나의 헌신과 희생 창의와 노력은 미래를 향한 밀알이 되어 모두가 노력한다면 행복한 국가 신뢰하는 터전이 되리라 확신한다. 정도가 살아 숨쉬는 나라는 배신과 불신이 시들고 이기적인 비방과 모함이 자치를 감추면 상호 간에 믿음과 신뢰가 쌓여 더욱더 성장하리라고 확신한다. 다변화시대의 지도자는 더욱 외롭고 고뇌에 여정이 전개될 것이다.

모두가 내 타시라는 책무를 잃지 말고 상호견제와 균형을 위해 고뇌한다면 정의가 살아나 행복한 삶의 터전이 울창하게 성장 발전하리라 확신한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고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듯이 온 누리에 평화와 번영이 함께 하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 패배감과 분노를 씻어 주고 희망을 심어 주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러나 미루거나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 갈등을 풀지 않을 때는 고풀이(한을 고로 풀어 나가는 굿거리) 굿을 한다고 한다. 계층간의 갈등을 푸는 데도 고풀이 굿이라도 해야 될 듯 싶다.

고풀이 굿이 맺힌 곳을 푸는 것인 만큼 잘 달래는 일이 중요하다. 그간의 응어리를 이해하고 어루만져 풀어 주는 일이 앞서야 한다. 이 한풀이를 누가 해 줄 것인가. 그것은 강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결자해지란 점에서도 그렇고 일의 성질로 봐서도 그렇다.

이 고풀이가 양보와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만큼 여유를 가진 쪽에서 먼저 풀어야 할 매듭이다. 비록 그들의 요구가 사리에 벗어나고 표현이 지나친 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간의 억눌림에 대한 반동이라 이해하고 그들의 요구에 성의있게 귀를 기울어야 한다.

저편의 요구에 성실히 귀를 기울이면 상대도 이편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간의 갈등 현상을 보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투쟁적인 방법만을 써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혈육같이 생각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 보기를 부모같이 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초개같이 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원수같이 한다’ 하신 성현의 말씀은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지속성장을 내세우거나 안정을 바라는 다수 여론을 빌미 삼아 거대 정치의 위세를 등에 업고 힘으로 해결하려 든다면 우울한 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기우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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