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
상태바
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
  • 장강뉴스
  • 승인 2021.12.03 17: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산면 유량마을에서 찾은 아픈 과거사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 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부산면 옹구막 민간인 학살 현장
부산면 옹구막 민간인 학살 현장

장흥 부산면 유량마을에서 찾은 아픈 과거사

장흥읍에서 북쪽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5km 지점에 위치한 유량리는 서쪽의 수인산과 북쪽의 기역산이 유량리까지 그 맥을 잇고 있다.

마을에 버드나무가 많고, 지앵소(柳枝鶯巢)의 형국, 즉 꾀고리가 버드나무에 둥지를 튼 형국이라고 하여 유양리라고 하다가 광복 후 행정구역개편으로 유량으로 부르게 되었다.

유량마을은 조선 말기인 1840여 년부 터 놋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 온 마을로 그 당시 각처에서 영세 상인들과 기술자, 일꾼들이 모여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그 맥은 이어졌고 당시에는 유기공장 3곳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을 함양여씨(呂氏)인 몽호가 운영하였다.

일제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유기를 수탈해 간 탓으로 원료 구입이 어려워지자 유기 제조가 중단되었다.

장흥의 특산물 중의 하나였던 유기그릇. 장흥군 부산면 유량리 여남선(1901년생, 여호정의 동생)씨의 제작공방(사진출처 : 장흥의 100년사)
장흥의 특산물 중의 하나였던 유기그릇. 장흥군 부산면 유량리 여남선(1901년생, 여호정의 동생)씨의 제작공방(사진출처 : 장흥의 100년사)

 

광복 이후 다시 유기를 생산하여 명맥을 이어왔으나 1950년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여남선(1901년생)에 의해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유기산업은 이후 스테인레스 제품이 시장을 점유하게 되자 결국 1962년에 맥이 끊기고 말았다.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유기산업을 일으켜 경제적으로 부유했었으나 한국전쟁이 끝나고 ‘배를 곯고도 얼굴 부순 사람들은 유량 사람들밖에 없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폐촌이 되다시피 하였고 그 이후 어렵고 내세울 것 없는 마을이 되어 무시당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유량마을은 귀농·귀촌이라는 이름으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역색이나 마을의 텃새 등의 장벽 없이 마을 속으로 스며들고 동화되어 더불어 잘살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전쟁 전후 부산면 유량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며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희생자의 제적등본을 살피던 중 중요한 기록을 찾아냈다.

‘1940년 4월 12일 오후 3시, 장흥면 동동리 281번지 장흥경찰서 유치장 내에서 사망’ 여호정(가명, 1892년생)의 제적등본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사망 일자와 장소다.

1950년 당시 부산면 별천교 아래 민간인 학살 현장을 가르치며 증언하는 여주훈씨.
1950년 당시 부산면 별천교 아래 민간인 학살 현장을 가르치며 증언하는 여주훈씨.

후손인 여주훈(가명, 1947년생)씨로부터 일제강점기 일제의 수탈정책에 항거하며 자결한 할아버지와 한국전쟁 중 지방좌익에게 희생당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숟가락까지 수탈해 가던 시기, 부산면 유량리 여호정의 유기공장에는 놋그릇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신주나 구리 등을 많이 비축해 두고 있었다.

일제는 이를 강탈하려 하였다. 여호정은 죽을 각오로 거부하였고 일경은 일제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절도죄’라는 죄명으로 여호정을 끌고 가 장흥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해 버렸다.

이에 분개한 여호정은 1940년 4월 12일(음력 3월 7일) 오전 3시, 장흥군 장흥면 동동리 281번지 장흥경찰서 유치장 내에서 일제의 수탈정책에 반대하며 유리창에 머리를 찧어 자결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50년 7월 28일, 인민군이 장흥지역을 점령하자 곧 부산면과 유량리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경찰들은 후퇴하였고 대한청년단 등에서 활동했던 주민들은 인근 야산이나 먼 친척 집 등으로 피신했다. 그중 일부는 인민군이나 지방 좌익에 의해 색출되어 구금되거나 학살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부산면 대한청년단(1950년, 사진제공 : 여주훈) - 여용수(맨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부산면 대한청년단(1950년, 사진제공 : 여주훈) - 여용수(맨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한편,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했던 여용수(가명, 1917년생)은 이런 낌새를 눈치채고 제암산 아래 처가(장흥읍 금산리)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자 인민군 측에서는 여용수의 어머니와 작은어머니, 작은아버지를 인질로 잡아 보안서에 구금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여용수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마을로 돌아왔고 바로 연행되어 보안서에 구금되었다.

1950년 10월, 장흥지역이 경찰에 의해 수복되어 오자 인민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인민군이 퇴각할 당시에도 지방 좌익의 활동은 지속되고 있었다.

1950년 10월 4일(음력 8월 23일), 마을의 좌익세력들은 잡아 가두고 있던 민간인들을 새끼줄로 묶어서 줄줄이 끌고 갔는데 이들이 도착한 곳은 부산면 용반리 별천교 아래 어인보(수리시설) 옆 구덩이 앞이었다.

사건 직후 소식을 들은 여용수의 아내 김효식(가명, 1921년생)은 당시 4살이었던 아들을 업고 현장에 달려갔다. 구덩이 안에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시신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이때 희생당한 사람들은 여용수씨를 포함하여 경찰 출신 서울 양반과 정씨, 박씨 등 9명이었다. 여용수는 1940년 일제의 수탈정책에 반대하며 자결한 여호정의 큰아들이다.

당시 어머니의 등에 업혀 현장을 목격했던 여주훈(가명, 1947년생)씨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의 광경을 결코 잊을 수 없었으며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1950년 당시 부산면 유량리 옹구막 민간인 학살 현장을 가르치며 증언하는 임명수씨.
1950년 당시 부산면 유량리 옹구막 민간인 학살 현장을 가르치며 증언하는 임명수씨.

한편, 인근 마을인 지천리 지동마을(갓골)에서는 임수근(가명, 1902년생)씨가 지방 좌익에 의해 끌려 나오고 있었다.

별천교 아래 구덩이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1950년 10월 4일 늦은 오후였다. 임수근은 농부였다. 농사 규모가 크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에 속해 마을에서는 유지로 통했다고 한다.

그날 밤 10시, 그는 부산초등학교 뒤편에 있었던 옹구막 구덩이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마에는 총상이 있었고 여기저기 죽창으로 찔려 죽은 상태였다.

당시 함께 발견된 희생자는 임수근씨를 포함하여 용두마을 유남철(가명)씨 등 7명이었다.

“하! 말도 못 해, 나도 어리재 열세 살밖에 안 돼, 째깐한 것이 시신을 볼 것인가? 나중에 들었지, 어마어마했어, 팽야 농사짓는 사람들을 죽여야 쓸 것인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던 임명수(가명, 1938년생)씨는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듯 한참이나 눈을 껌벅거렸다.

옹구막이 있었던 자리라고 알려 준 곳은 이미 집터가 되어 그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아픈 과거사는 잘 가꿔진 잔디에 깔려 침묵하고 있었다. 〈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