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 아들을 잘 아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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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 아들을 잘 아는 아버지
  • 장강뉴스
  • 승인 2021.11.0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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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최근 인사동의 한 서점에서 ‘서계 박세당의 필첩’이라는 헌책을 한 권 샀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어지러운 서가에서 이상하게 한눈에 띈 책이다.

임철순
임철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내가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관심을 갖고 있던 분이다.

서계의 시문은 물론 문인(門人) 등에게 보낸 간찰을 수록한 책에는 그의 2남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편지도 몇 점 실려 있었다.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친국과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36세로 숨진 사람이다.

생애는 짧았지만 형 백석(白石) 박태유(朴泰維, 1648~1686)와 함께 우리 서예사에 빛나는 그의 필적은 유려하고 시원시원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글씨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실상 내가 서계에 대해 이끌린 이유는 노장철학에 밝고 주자학을 비판했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렸다거나 하는 것보다는 아버지로서의 안타깝고 애타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두 아들을 앞세우는 참척을 당한 아버지였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불의를 견디지 못했던 큰아들 태유도 험난한 벼슬살이 끝에 일찍 병사했다.

서계와 박태보의 일화는 천재들의 대결처럼 재미있으면서도 부자 사이가 어찌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글을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과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 1711)보다 아래라고 평가하자 서계는 “네가 나를 너무 가볍게 본다”고 섭섭해 했다. 서계의 처남인 남구만은 박태보에겐 외삼촌이었다.

마당의 살구 개수를 놓고 내기를 했다가 아들이 틀렸다고 꾸짖자 아들은 나뭇잎에 가려진 것 하나를 기어이 더 찾아내 아버지를 이겼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의 '자저실기(自著實記)'에 의하면 서계와 박태보는 사사건건 서로 져주는 법이 없었다. 충청도 소사 지역의 비석이 길의 동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를 가리기 위해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한 일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 서계는 조선의 여느 남자들과 달리 자식 사랑을 감추지 않고 표현했던 사람이다.

아내를 잃었을 때 어머니 산소를 지키며 효성을 다하는 아들의 건강을 걱정해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울고 곡하는 것도 그만두어라.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곡하고 우는 데 달려 있지 않다.”고 편지로 말린 사람이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귀양길에 오른 박태보는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닿았을 때 더 가지 못하고 사육신 사당 아래에서 숨졌다. 아버지 서계는 그때 “어찌하겠느냐, 그저 조용히 죽어 마지막을 빛내라”고 어루만졌다.

태보는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대답했고, 아버지가 울면서 나간 뒤 숨이 끊어졌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 부자간의 마지막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리다. 큰아들을 잃은 지 3년 만에 작은아들을 잃고, 서계는 그로부터 17년을 더 살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두 아들의 강직함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는 꺾이지 않는 두 아들을 보며 늘 마음 졸이며 살았다.

‘한비자’에 지자막여부(知子莫如父)라는 말이 나온다. 아들을 아는 데는 정말로 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을까? 가부장적인 전통시대에는 아버지의 권위와 집안의 위계질서를 지탱해주는 금언처럼 작용해온 말이다.

서계는 겨우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열세 살 때 고모부로부터 글을 배운 사람이다.

그러니 아들에 대한 걱정이나 아버지로서의 정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강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아버지들 중 ‘지자막여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박세당 부자의 일을 읽으면서 나 자신의 경우를 돌아본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이해를 받고 살았으며, 지금 나는 두 아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비슷한 듯 서로 전혀 같지 않은 부자의 필적을 살펴보면서 고금의 일과 인간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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