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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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 6
  • 조창구 기자
  • 승인 2017.11.2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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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농민군 ‘소년장수 최동린과 후손’ ‘이사경 대접주와 후손’

소년장수 최동린 ‘17살 나이에 말을 타고 농민군 지휘 활약’
이사경 대접주 ‘이방언 장군과 집강소 활동…중요역할 담당’

■소년장수 최동린과 후손

‘최재호, 최동린의 막내동생 아들로 태아나 양자로 입적’

 

▲ 최동린 인물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17세 소년 ‘최동린 장수’가 있었다.
이인환 대접주가 활동 본거지로 삼았던 대덕 연지리에서 출생해 동학에 참여한 소년장수 최동린이다.
최동린은 석대들전투 패전 후 밀려난 농민군들과 고읍면(현 관산읍) 옥산전투에서 일본군의 총격에 다리관통상을 입고 피신해 이틀 뒤 인근마을에 숨어있다 체포돼 나주로 압송됐다.
3월 3일 이인환, 이소사, 문공진, 이득춘과 함께 처형된다.
소년장수 최동린의 아버지인 최자명도 천관산밑에 토굴과 나막신굴 등에서 피신해 다녔으나 주변 사람들의 밀고로 잡혀가 처형당했다.
소년장수 최동린의 후손 최재호(89)씨를 만났다. 최재호씨는 원래 최동린의 삼형제중 막내동생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절손이 된 최동린의 양자로 입적됐다.

▲ 최재호씨

최재호씨의 증언에 의하면 부친과 형님을 잃고 많던 재산도 다 뺏기고 최동린의 동생이자 최재호씨의 친아버지는 울면서 얻어먹고 살았다고 한다. 맨발에 추운데도 질벙 질벙 돌아다녀 동네 할머니들이 옷이며 신발을 해 입혔다. 집안에서는 조부님과 부친의 시신을 못 찾아 가묘를 써야 했다. 동학군이 패전하고 대대적인 동학농민군 색출에 나서자 조부님의 형제들은 삭금, 분토, 신리 등으로 흩어져 말도 못하고 살았다.
최재호씨의 아내 김정월(84)는 22살에 회진 덕산에서 시집왔다. 와보니 남편은 남의 집 머슴살이 하고 있고 아무것도 없는 집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부부가 열심히 살면서 2남5녀를 키워냈지만 어려운 형편에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다.
동학했다 하면 역적소리를 듣던 시절 조부님과 부친의 사연을 숨기고 살던 최재호씨. 집안에서는 동학과 연루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조부님과 부친의 이름을 호적에서 빼버렸었다는 기막힌 일도 겪어야 했다.
해방과 산업발전, 민주화로 세상이 바뀌면서 유족회가 결성되고 동학혁명에 대한 명예회복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밝힐 수 있게 됐다.
이후 최 씨는 동학행사에 열심히 다녔다. 그러나 연로해진 탓에 체력이 약해져 병원을 자주 찾고 보청기를 껴야 하는 형편이 되다 보니 작년부터는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 최재호씨와 부인 김정월씨

최재호씨는 “혹독한 세상 살아오느라 고생했어도 소년장수의 얘기를 들으면 자랑스럽다” 며 “이제는 누굴 탓하면 뭐 할껏이요. 동학문제는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해야제. 그라고 돈 욕심보다 부친을 기념하는 사당이나 지어줬으면 좋겠다”고 소원했다.

▲ 손자 최행길 씨

소년장수 최동린의 손자로 서울 구로구에 기계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최행길(52)씨.
옛날에는 동학과 할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몰랐다는 최 씨는 “아버님이 술 드시면 대부자였는데 동학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 됐다는 얘기를 간혹 하셨다”며 “동학행사에 다녀 보니 헌법이 3.1정신을 이었다고 하고 동학혁명이 3.1정신과 연결된다고 하는데 전북 정읍 동학농민군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 너무 협소해 들어갈 자리도 없는 형편이다”고 서운해 했다.
이어 최 씨는 “국립묘지처럼은 안 되더라도 부지가 있으니 밖에 비(碑)라도 만들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말했다.

 

 

■이사경 대접주와 후손

‘부산면 용반리에서 활동 이사경 대접주’

 

▲ 이사경 대접주 인물화

이정태(69)씨는 조부와 부친과 함께 3대를 이어 동학을 이끌었던 이사경 대접주 가문의 증손자이다.
인천이씨 집성촌인 용반리 일대에서 대접주로 활약했던 이사경 대접주의 증손자 이정태씨를 만났다.
이사경 대접주는 동학혁명 당시 대접주로 활동하며 장흥지역 남도장군 이방언 장군 등과 함께 동학혁명 1차기포와 전주화약, 집강소 활동, 2차 기포까지 동학농민혁명군의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이사경 대접주의 가계는 일찍 할아버지 이석년부터 동학에 가담했으며 부친인 이호인과 호의, 호신 형제도 동학에 가담했다 사망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훌륭했으며 조부님과 부친의 후광까지 있어 35살이전 이사경이 접주로 맹활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대들 패전 후 장흥수성군과 민인들에게 체포돼 벽사역에서 유지기에 씌워 화형 당했다.
당시 용반리앞 기역산이 울었다고 전해진다. 이사경 대접주의 아내가 시신에 타다 남은 옷고름을 보고 찾아내 밤중에 옮겨와 장사지냈다.
동학이후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며 핍박받자 동네에서 버티기 힘들어 이정태씨의 부친은 만주와 이북쪽으로 명태장사하러 다녔다. 몇 년만에 고향에 한번 올 정도였다. 부산에서 살던 증손자 이정태씨가 중동에 가서 2년동안 일해 번 돈으로 땅을 조금 마련해 1983년 고향에 정착했다.

▲ 이정태씨

이정태씨는 이후 동학농민혁명 유족회가 만들고 명예회복특별법이 생기고 유족증명서 서훈 추진등록, 유족회 사단법인 등록하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정태씨는 “옛날 어렵게 사니 증조부님에 대한 자부심 생각도 못했다”며 “지금은 선조덕에 보탬은 안되고 있지만 역사적 증명될 수 있는 매체에도 출연하는 등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증조부님이 당시 큰 역할 했음에도 산속에 비석 하나 없이 있어 안타깝다. 몰락해가는 세상을 개혁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선양사업 제대로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웅치 대접주로 활약한 구교철 대접주, 후손 연락 끊겨

구교철 대접주는 동학혁명 당시 웅치에서 활동하다 11월 21일 기포해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인물인 구교철 대접주의 후손을 수소문했다.
구교철 대접주는 옹치에서 활동하다 기포해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차 기포 후 전주화약에 따라 폐정개혁안이 실시되자 웅치면에 집강소를 설치해 운영을 주도했다.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격전지였던 석대들전투 이후 웅치지역으로 물러나 일본군의 수색에 함께 한 농민군과 근거지를 잃었다.
구교철 대접주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웅치지역 일본군 수색소탕작전에 저항하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교철 대접주은 장평면 기동리가 고향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동리 일대 능성 구씨의 관련 묘비가 있는 3곳을 방문해 후손들의 흔적 찾기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장흥동학유족회에는 2~3년전 동학행사에 구원주, 구형주씨가 후손이라며 참석해 인사 나눴으나 이후 왕래없는 상태였다.
당시 알려준 핸드폰으로 연락이 닿지 않아 장흥동학유족회에 기록된 주소지를 찾았다. 광주광역시 소재 해당주소지 아파트 관리사무소측에 확인 결과 9년 전인 2009년부터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사무소와 능성 구씨 대종회측에도 의뢰했으나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다.

■말을 타고 농민군 지휘했던 23살 여동학 이소사(이지이)

‘미모의 여동학 이소사씨 후손 못찾아’

 

▲ 이소사 인물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여자의 몸으로 장흥지역전투과정에 참여해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다. 당시 23살이던 여동학 이소사(이지이)이다.
이소사에 대해서는 장령성전투에서 말을 타고 지휘했던 여장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일본 국민신문에는 미모의 여동학, 경국지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소사는 석대들전투 후 민인들에 체포돼 소모관 백낙중에게 바쳐져 민병들에게 고문당했다. 허벅지살이 잘려지는 살인적인 고문을 당한 후 나주에 압송됐다.
나주에 있던 일본군 대대장의 기록에 상처부위가 썩어 악취가 코를 찌르고 대소변을 못가릴 정도로 참담했다는 사실로 보아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소사가 고문으로 정신착란증세를 보이자 간호를 위해 남편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장흥부 남쪽 40리에 있는 남편 김양문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소사와 관련하여 장흥군 향토사학자 위의환 선생에 따르면 이소사는 인천이씨로 추정되며 족보에 남겨진 흔적을 찾기 위해 장흥에 있는 인천이씨 족보에서 사위이름으로 다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유족회 등을 통해 수소문해봤지만 아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인환 대접주 동학농민군 2차 기포해 6연승을 이끌어 낸 주인공

‘이인환 대접주 후손 못찾아’

 

▲ 이인환 대접주 인물화

대흥면(대덕읍) 대접주로 활동하다 기포해 회령진성, 흥양현, 벽사역, 장흥부, 강진현, 병영성까지 동학농민군 6연승의 주인공이 이인환 대접주다.
이인환 대접주는 나주 남평 출신으로 대덕 연지리에 자주 내왕하다 동학의 대접주로 활동했다.
1891년 9월 15일 동학에 입도하여 충청도 보은집회에 참석, 갑오혁신운동에 1차로 참가 수만군중의 접주가 되어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고 열렬히 하던 중 관군과 일본군의 토벌대가 장흥일대로 내려오자 기포하여 장흥과 강진 일대의 전투에 맹활약 했다.
이후 석대들전투에 패해 천관산 암혈 속에 은거해 후일을 도모하려다 체포돼 나주로 이송 1895년 3월 3일 죽임을 당했다.
이인환 대접주의 후손은 찾을 수 없는 상태다. 이인환 대접주의 사위가 대덕 도청리 인근에 살았던 유창오라는 사람이었는데 관산읍 수동 덕도를 잇는 노두길옆 주막에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지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자취를 알 수 없는 상태다.

 

■ 동학 당시의 후손 찾기를 마치며...

이번 기획취재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역인물들의 후손 찾기에 나섰다. 벌써 12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후손들도 3~4대를 지나고 있는 만큼 기억도 희미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후손들을 찾아 그들의 아픔과 동학혁명의 의미, 지역내 농민군과 수성군의 역할과 한계 등을 되짚어보는 기회가 되었다.
오랜 세월만큼 증언이나 자료 멸실의 기회는 커가는데 다행스럽게 남도장군 이방언 장군과 장흥지역 대표적인 농민군들의 발자취와 수성군의 사연, 강진지역 윤세현, 김재득 농민군과 수성군 김한섭 도통장의 후손을 찾아 사연을 전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짧은 기간의 기획취재상의 어려움으로 동학혁명 당시 참여했던 분들 중 구교철, 이인환 대접주와 이소사(이지이)와 관련된 이야기들과 그 후손들의 발자취 더 자세히 파헤치지 못한 점 아쉬움으로 남는다.
앞으로 동학과 관련된 더욱 많은 기록물과 국역자료들이 발굴돼 숨겨졌던 역사의 페이지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장강뉴스은 차후에도 동학농민혁명과 후손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갖고 취재보도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취재에 협조해주신 동학농민혁명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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