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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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 ③
  • 조창구 기자
  • 승인 2017.11.0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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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수성군 ‘박헌양' 부사와 후손 / 유학자 '김한섭' 도통장과 후손

장흥 장령성 지키다 목숨 바친 박헌양 부사 / 강진읍성 사수한 유학자 김한섭 도통장

123년전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이 밀려드는 장흥부를 지키다 96인이 사망했다. 당시 장흥부의 책임자였던 박헌양부사와 후손들, 동학농민군의 궐기를 반대하고 직접 함락위기에 처한 강진읍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김한섭 도통장과 후손들의 삶을 알아봤다.

■ 박헌양 부사와 후손들

▲ 박헌양 부사 순절비(영회당)
반남박씨인 박헌양부사는 1894년 7월 30일 부임해 부임 4개월 6일만에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전라도 삼례에서 2차기포한 동학농민군은 이인전투에서 관군을 몰아부친 후 11월 9일 일본군이 합류한 충청도 공주인근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상태였다.
후퇴한 농민군과 장흥 에서 기포한 농민군들이 장흥출신 이방언 장군 등의 지휘하에 12월 5일 장령성을 공격 함락했다.
박헌양 부사는 피신할 것을 권유하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성을 사수하다 사망했다.
장령성이 함락위기에 처하자 아들이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다 20일 뒤 와서 장례를 치뤘다고 전해진다. 박헌양부사는 사후 내무참의(정3품)에 추증됐다.
반남박씨 대종회의 설명과 족보에 따르면 박헌양 부사의 자식으로 양자 승일이 있었고 승일은 양자 원서를 두었으며 증손자 박찬국씨가 있다.
박찬국씨는 미국 필라델피아 제일장로교회 장로로 있으며 1남2녀를 두고 있다. 증손자의 자녀들은 모두 미국에 살고 있으며 미국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장흥읍 예양리 영회당 뒤편에 박헌양 부사 순절비가 세워져있으며 비문 뒷면에 유학자 송사 기우만이 공덕을 찬했다.
안양면 기산리에 살던 유생 백영직은 그의 문집 육유집에 ‘박후의적’(박헌양부사의 의로운 발자취)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 장흥 영회당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군으로 장령성을 지키다 사망한 96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영회당에는 수성군 후손들이 모여 매년 음력 3월 15일 합동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 박헌양 부사 족보

■ 김한섭 도통장과 후손들

▲ 김한섭 도통장 비석(강진군 신전면사무소 위치)

동학혁명 당시 학문을 가르치던 유학자로서 동학농민군의 궐기를 반대하고 직접 함락위기에 처한 강진읍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김한섭 도통장이다.
도통장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의병장처럼 지역책임자에게 붙여진 호칭이다.
강진 보암면(현 도암면)에 거주하던 김한섭 도통장은 ‘경시적도문(적도에게 경고하며 내보이는 글)’이라는 글로 동학농민군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듣지 않자 제자 수십명을 모아 강진읍성 서문을 수성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농민군 대장 이방언과는 고산 임헌회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사이였다. 저서로 오남집 7권이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도난우려 등으로 방촌유물전시관에서 보관해오고 있다.
김한섭 도통장은 원래 장흥 흥룡동(부산면 내안리) 출신으로 40세 때 금릉 대명동(현 강진 성전면 송월리)으로 이거해 서재를 짓고 강학에 힘썼다.
53세에 강진 보암면 수양리로 옮겨 봉양정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오남 김한섭 도통장의 죽음 후 부산면 내안리 뒷산에 흥룡단이란 단향을 조성해 후손들과 유림들이 모셔오다 직계후손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중단됐다고 한다.

▲ 김한섭 도통장 족보

강진에서 강학을 들었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뜻을 모아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도 강진 신전면사무소 입구에 가면 볼 수 있다.
김한섭 도통장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며 비록 본인은 사망에 이르렀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진압되면서 일제의 주권침탈과정에서도 별 탈 없이 후손들이 지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한섭 도통장의 후손중에는 군대에 입문해 장성급에 오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판사와 경찰공무원 등으로 큰 직위에 오른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 박헌양 부사 족보

경찰공무원 고위직에서 퇴직한 김한섭 도통장의 한 후손은 “당시 고조부님께서 유생신분으로 순절하셨는데 동학농민운동이 동학난으로 불리다 혁명으로 평가하는 마당에 특별히 드릴 말이 없다”며 “할아버지께 누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다”고 인터뷰 요청도 고사했다.

<참고문헌: 장흥동학농민혁명과 그 지도자들, 위의환 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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