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농업을 빛낸 사람들 ②김용복(영동농장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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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농업을 빛낸 사람들 ②김용복(영동농장 명예회장)
  • 임순종 기자
  • 승인 2017.04.2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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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의 아들로 ‘농자천하지대본’이룩한 ‘농업인’

‘평생 농사꾼’ 김용복 영동농장 명예회장

농업인들의 ‘산증인’…농사지어 부자 되는 ‘롤모델’
사막의 기적…땅이 있으면 생명은 자란다는 ‘신념’
‘80 평생 흙 농사  사람 농사  사랑 농사 실천  ~ing’

▲ 김용복 영동농장 명예회장
■빈농 아들로 태어나 100만평 농장 일군 김용복 회장
   땀 흘린 만큼 정직하게 보상을 해준 것은 ‘땅’

강진군 군동면 석교마을이 고향인 영동농장 김용복 명예회장은 ‘사막에서 기적을 일군 사나이’로 통한다.
김용복 회장에게는 ‘사막의 녹색혁명기수, 인간상록수, 기부실천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김용복 명예회장은 1979년 사막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막을 개간해 배추와 무를 심어 중동의 건설 노동자에게 김치를 제공하겠다는 꿈을 안고 단돈 7달러와 삽 4자루만 덩그러니 들고 떠났다. 당시 중동에는 엄청난 수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진출해 있었다.

▲ 1981년 5월 사우디 아라비아, 리아드 제2(서울)영동농장 40만 평 무밭에서
사막의 모래땅과 섭씨 40∼50도의 뜨거운 뙤약볕에서 채소를 가꾼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성공할 수 없다며 주변에서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는 여기서 물러나면 내 인생은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덤볐다.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발상이었다. 그때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라면 하나로 두 끼니를 때우면서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에서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않고 일해 주위에서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포기 하지 않고 채소를 가꾸었다. 수많은 실패와 악전고투 끝에 사막의 땅에 파란 새싹이 돋았고, 그토록 원하던 배추를 500㎏ 생산하는데 성공하며 승승장구했다.
사우디에서 채소농사로 성공을 이룬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 1982년 사우디 아라비아 제2(서울)영동농장에서 생산한 13kg짜리 무
김 회장은 1982년 채소재배에 성공해 벌어들인 돈으로 고향 일대의 땅을 9억 원에 사들여 조성했다. 갯벌이었던 땅을 네덜란드 간척 전문회사에 의뢰해 현대식 농경지로 조성해 1983년 강진군 신전면 벌정리에 영동농장을 설립했다.
영동농장은 간척지 70만평에서 연간 1만 2천여석의 고품질 친환경 쌀 ‘그린음악쌀’을 생산해 농업분야를 선도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 최초로 미국 농무성에서 인증한 ‘USDA 유기인증’ 쌀로 즉석 밥을 만들어, 유기농 쌀 7.6톤을 미국 에 수출했다. ‘USDA 유기인증’ 은 최소 3년 동안 화학 비료와 금지된 물질을 사용하지 않은 토양에서 재배된 유기 농산물이나 유기 가공식품임을 인증하는 마크로서 인증기준이 엄격해 인증받기가 매우 어렵다고 정평 나있다.
김 명예회장은 “유기농업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길임을 인식하고, 오로지 수십 년간 한길만 걸어왔다. 지난 2000년부터는 벼에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농법과 유기농법 농사를 짓게 되면서 경쟁력을 키웠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명예회장은 “농업은 인간의 생존 자체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산업인데도 이를 경시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며 “농업 방식에 경영시스템을 도입해 경쟁력 있는 쌀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공스토리-굶주림, 목마른 사랑, 못 배운 한 ‘승화’
   수많은 역경과 좌절 실패 ‘인생역전’

▲ 제1대 김용복 (재)한사랑농촌문화재단 초대이사장 취임(2003)
1933년 음력 5월 5남매 중 막내로 강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산이라야 논 두 마지기(400평)가 전부일 만큼 가난한 농부였다. 어머니는 1936년에 세상을 떠났고 7살 위의 형은 1948년 여순사건 때 총살을 당했다. 아버지는 1950년 3남매의 자녀가 있는 여인과 재혼을 했다. 가뜩이나 가난한 집안에 식구가 더 늘어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월사금을 넉 달씩이나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15살 소년은 눈물, 콧물이 범벅인 채 책가방 하나 달랑 들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무작정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그는 “땅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었다. 하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부산역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며 구걸을 하던 중 우연히 미군 트럭과 마주쳤다. 중학교 때 배운 영어를 떠올려 “아이 엠 컨트리 보이. 아이 엠 헝그리. 헬프 미”(저는 시골 소년이다. 배가 고파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자 미군병사는 미군부대로 데려가 하우스보이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미군부대에서 온갖 멸시를 다 받으며 구두닦이, 청소, 세탁 등 잡일을 하면서도 영어와 운전 실력을 갈고 닦았다.
▲ 1988년 장학생 선발 장학증서 전달
한국전쟁이 끝난 후 영어와 운전 실력을 갖춘 김 명예회장은 손쉽게 취업에 성공했다. 또 건국대를 주경야독하며 야간 과정을 밟아 졸업장도 따냈다.
안정된 직장과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대졸 타이틀을 달았음에도 넓은 땅을 소유하고 싶었던 그는 1965년 월남전 때 미국 반넬 회사에 보급행정 기능공으로 지원해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월급 350달러를 받으며 5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비록 고향을 떠났지만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받은 첫 월급 350달러를 강진군수에게 보내 고향의 불우한 환경의 후배들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베트남에서 번 돈을 서울 강남 말죽거리 일대에 9000평(2만9752㎡)의 땅을 샀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일시에 거부가 됐다. 이 땅을 팔아 국제수출포장회사를 차렸고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직원 기숙사 연탄가스 사고로 2명이 죽어 보상비로 회사를 정리하고 파산한다.
남은 재산으로 고향에서 실뱀장어 양식을 시작했으나 일본 수출길이 막혀 이 역시 실패했다. 김 회장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재기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벌였지만 그 때마다 위기를 맞이한다. 사우디아라비아 현지 대기업에 납품을 하는 사업을 벌였지만 직원의 배신으로 투자금도 회수 못하고 강제 추방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알거지가 되어 당시 철거민들이 살던 경기도 성남에서 한 그릇에 150원하는 설렁탕 장사를 하며 자학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며 재기를 꿈꿨다. 그때 당시 김 회장은 무일푼이 된 그 시절 죽음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하는 것마다 안되는냐는 자괴감으로 몸부림 쳤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는데 왜 내겐 실패만 돌아오느냐며 술에 젖어 살며 광기에 찬 반항을 하던 시기였다.
김 회장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꿈을 갖고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때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 김 회장이 제 2의 인생역전에 도전하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이같이 김 회장의 인생은 수많은 역경과 좌절, 실패가 있었지만 인생역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감과 용기, 신념이 하나 된 농심(農心)이 천심(天心)이 되어 만들어낸 건 아닐까.

■‘끝없이 도전하고 아낌없이 나눠라’
    농사는 마음이고 사람이다

▲ 2012년도 (재)용복장학회 특별장학금 수여식
김용복 명예회장은 영동농장은 농업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1989년도에 용복장학재단 설립에 20억 원, 2005년에는 한사랑농촌문화재단에 100억 원, 2016년에는 월정어린이복지재단에 33억 원을 환원, 월정나라 바람공원 7억 원 들여 조성하는 등 사회적 문화 사업을 지원해 오고 있다
김 회장이 사재를 몽땅 털어 장학재단과 복지문화재단 일에 열정을 바치고 이유는 뭘까 그의 살아온 인생을 들여다보면 답이 나왔다.
▲ 2013년 1월 2일 아너소사이어티(고액 기부자 모임) 1억 기부 (2013년 아너소사이어티 1호 기부자)
김 명예회장의 회고는 그의 ‘사는 방법’의 이유를 명확히 그리고 절실하게 설명한다. 그의 저서에 “저에게는 세 가지 굶주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해서 배를 곯았던 굶주림,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사랑도 새어머니에게 빼앗긴 사랑의 굶주림, 또 배움에 대한 굶주림입니다. 육신과 사랑, 그리고 배움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돌아보면 이러한 굶주림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가난은 저에게 큰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젠 넘치도록 채우며 삽니다.”
김 명예회장은 질곡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두 가지 꿈을 항상 떠올렸다. 첫째, 가난한 학생들을 도와 그들이 성장해서 국가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장학사업이다. 두 번째, 건실한 농부였지만 땅이 없어서 항상 소작농의 서러움 속에서 힘겹게 살았던 아버지를 위해 논과 밭을 사들여 실컷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효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김 명예회장이 설립한 재단의 장학금을 통하여 현직 판사, 대학 교수, 의학 박사, 사회 인사 등 우리사회에 필요한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 2014년도 제8회 한사랑농촌문화상시상식

▲ 2013년 4월 18일 어린이를 위한 재단설립을 발표하는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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