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틀림 아닌 다름(言行心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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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칼럼 - 틀림 아닌 다름(言行心思)
  • 장강뉴스
  • 승인 2022.09.2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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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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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은 인격이다. 언행심사(言行心思), 곧 말과 행동 마음 생각이 바르고 일치되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하는 이유다.

그래서 말을 보면 사람의 품격을 알게 한다. 아니 개인의 인격을 넘어 집단의 문화를 상징한다. 말의 생명력이자 상징성이다. 사회지도층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신중하게 해야한다.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들이 조심해야 한다. 사람은 할 말 한 할말 가려야 한다. 금도(襟度)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정조는 말을 조심하라며 사람은 언어로 한때의 쾌감을 얻으려 해서는 안된다.

나는 미천한 마부에게라도 일찍이 이놈 저놈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고 가르쳤다. 어느 분야든 지도자는 무릇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언어는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생각과 느낌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어떤 언어를 사용하거나에 따라 사고(思考)도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사회학자들은 잘못된 용어 사용이 인지적 오류의 한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다른 그림 찾기라고 부를 때 차별에서 차이로 인식의 지평이 전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소가 초식 동물이라는 사실도 상식으로 통한다.

그런데 미생물학자인 마르크 앙드레 슬로스는 혼자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소는 네 개의 위를 가지고 있는데 되새김 위는 그 속에 있는 박테리아와 균류 그리고 섬모층류들의 발효 작업장이라고 한다.

이들은 메탄가스 수소 휘발성 지방산들을 만들어 내고 이 지방산들이 소위 세포가 에너지를 만드는 데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황당하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흔히 개 풀뜯어 먹는 소리 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개들은 풀을 먹기도 한단다.

육식동물의 대표격인 호랑이도 필요시 풀을 먹는데 전하는 발에 따르면 기분이 우울할 때면 알코올이 발효된 열매를 찾아 먹기도 한다. 그러니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로 양분하는 방법은 학문적 편리함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보편진리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인식을 양분하여 나와 상대로 편을 가르게 되면 자칫 흑백논리에 빠지거나 근거 없이 감정에 따라 결론짓는 감정적 추리 등의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이어질 수도 있다.

나아가 편을 갈라 같은 편끼리는 사고와 행동의 일치를 강요하게 되고 우월성의 증표가 되어 상대를 차별하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오른쪽으로 올바름을 대신하니 왼쪽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오른손은 바른손이고 직장에서 직위가 떨어지면 좌천(左遷)이며 서얼(庶孼)의 자손은 좌족(左族)으로 불렀다.

양분법적 사고 속에서 정답을 정해 놓게 되면 사고가 경직되거나 편향될 수 있고 이를 의식한 나머지 자유롭게 사고하지 못한 개연성도 있다.

잠자는 아이 침대위에 칼을 놓아두어도 될까 싶지만, 베트남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 머리맡에 칼을 둠으로써 아이가 무탈하게 자라도록 기원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또한, 아이가 잠을 자고 보태면 베게 밑에 칼을 놓아두기도 한단다.

칼이 아이를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분적인 것에 근거하여 전체경험을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될 것이며 어떤 사건이나 한 개인의 경험을 잣대로 눈앞의 상황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일도 삼갈 일이다.

사람들에게 ‘十’자 새겨진 카드를 보여 주면 수학자는 덧셈이다 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이라 한다. 목자는 십자가, 교통경찰은 사거리, 간호사는 의사, 적십자는 녹십자라고 대답하는 법이니 말이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꽉 막힌 길을 뚫고 민족대이동을 하여 친인척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추석은 우리에게 통합의 날이며 이 통합은 문학적 경이다.

어제까지 다투던 사람들도 추석 앞에서는 다툼이 없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친지들이 함께 한자리에서 좌우의 진행 논리를 앞세운 편 가르기가 재현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 인간이 인공지능에 비해 우월한 영역이 공감과 상상력일진 데 온 세상을 골고루 밝게 비추는 한가위의 근본정신을 세상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컴퓨터도 이진법의 한계를 벗어나는 시대에 이분법적 양분 논리 속에 갇혀 지낼 이유는 없다.

고향집 한가위 보름달의 넉넉함을 배워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다가서고 공생과 상호 의존의 지혜를 더불어 나누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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