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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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3〉
  • 장강뉴스
  • 승인 2022.06.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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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지 마시오” 용산면 접정마을 열일곱 처녀가 겪은 한국전쟁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한국전쟁을 이야기 하는 이영남(90세) 할머니
한국전쟁을 이야기 하는 이영남(90세) 할머니

 

“죽이지 마시오” 용산면 접정마을 열일곱 처녀가 겪은 한국전쟁

근현대사 속에서 여성은 주변인이거나 경계에 선 존재였다. 특히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적극적 가담자도 갈등의 주체도 아니었으나 폭력의 최전선에 선 희생자일 때가 많았다.

용산면 접정마을은 독립운동과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장흥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나고 자라며 활동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경계인이었던 한 여성이 그 시대를 어떻게 통과해 나갔는지, 그리고 그 인물들과 동시대의 사람들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듣는 일은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 쓰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을 여러 번 찾아뵈었다.

“찾아오지 마! 한번 했응께. 할 말이 뭐 있어. 내가 이런 말 하고 나믄 꿈에 막 보여. 눈에다 보여부러. 그렇게 오래 돼얐어도. 눈만 감으믄 다 보여부러”.

그렇게 이영남(90세) 씨는 괴롭다 할 말 없다 그러니 다시는 오지말라 하면서도 매번 우리가 갈 때마다 질문 할 사이도 없이 쉼표는 저만치 치워 놓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면에서도 문어체의 정리와 설명을 지우고 그녀의 구술을 계속 따라가 보려고 한다. 한 번도 제대로 귀 기울여 본 적 없었던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소곳이 듣듯이.

용산면 면소재지(용인마을)
용산면 면소재지(용인마을)

 

◆왜정(일제강점기)과 어린 시절

“나는 학교라고는 못 댕겼어. 아부지가 (여자애들은) 베린다고 안보냈어. 일만 하라 그래 일만.

풀 베라 하고 모시 삼으라 하고 질쌈하고 베 짜고 미영 잡으라 하고 매 그런 거만 했제.

왜정 때는 작은 어메가 여관허고 우리는 농사 지었제. 일제 때 일본놈들이 농사를 지어농께 다 들고 가부러. 한주먹도 안되는 놈들 다 가져가고 개도 껍데기 뱃기서 끌고가고.

놋그릇도 다 가져 가부러. 가마니 치라카믄 가마니 치고. 배가 고파서 밥이 없어서 다 뺏겨불고 솔나무 벳겨서 밥 해묵고 쑥 뜯어서 죽 써 묵고 매 그라고 살았어. 사람들이 못 묵어서 죄 부서부러 (부었다).

우리 집은 논 열두 마지기 밭 일곱 마지기 했는디 괜찮게 산께 아부지가 소를 한 마리씩 잡더만. 큰 집 작은 집 나놔. 그래갖고 쑥국에다 그 놈을 해서 국이라도 묵은께 안붓었어. 그라고 있는 집은 구뎅이를 파 갖고 다문 멫 가마니라도 거그다 감차 놓고 몰래 찧어서 밤에 죽써 묵고 그랬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억

“접정은 마을이 두 개여. 저드리 있고 접정 있고 우리 사는 데는 새테여. 운주 가기 전에 접정이 있고 길 가운데 나무도 심어져 있고 거가 외가집이 있었제.

접정서 이승주가 우리 집안인디 그 집 옆에 유재성 씨가 살았어. 그 사람이 잘생겼어. 키도 크고 좋게 생겼어. 그 집 딸인가도 같이 놀고 그랬어. 근디 그 양반이 독립운동을 해가 지고 우리 아부지 보고도 하라 그라드만. 집에 왔드라고. 그때는 다 친구여. (같이 독립운동한 인천 이씨 이종기 씨도) 그 또래여. 그란디 우리 아부지가 마다 하드만. 나는 장사하는데 그런 머리 쓰것어 그라고. 그래서 우리 아부지는 손 안댔어.

그란디 (유재성 씨는) 나중에 해방되고 수문 갯바닥에 빠쳐 죽여 부렀다고 그라드만. 순갱들이 한 차 싣고 가서 새낙(새내끼, 새끼줄)으로 요로큼 묶어서 유치 사람이랑 다 갖다 수문 갯바닥에 빠쳐 죽이고 후퇴했다고.”

“어산 서쪽 문뱅곤(문병곤)이는 우리 애들 요만했을 때부터 독립운동 그걸 했어. 다 그 사람 촉새에 그렇게 된거여. 좋다헝케 귀가 기울어갖고. 문뱅곤이가 얼굴도 이러콤 크고 몸도 이래 겁나 커.

한번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는디 이렇게 먹고 또 주라케 또 준케 또 묵어. 워매 식구 밥이 다 없어져 부러. 밥을 일곱 그릇을 한번에 묵어. 내가 아저씨 먼 밥을 그러콤 묵소 하니케 나는 일주일 만에 밥을 묵는다 카드만.

그때 보고는 그 사람 안봤어. 그 사람은 어디서 죽었는지 모를꺼. 가족도 남자 찾아내라고 자슥들도 고생 많이 하고 각시도 뒤지게 고생하고 모두 죽었을거여. 제일 죄 없지”.

용산면 접정마을
용산면 접정마을

 

◆인공과 인민재판

“용산에서 우리 큰집 그 집이 제일 큰케 마당도 널르고, 그 사람들이 요만한 것들이 따발총 다 끌고 왔더랑케. 우리 또래 되는 것들이 그래갖고 우리들 노래 가르쳐줬어 최후의 결전가. 이제 다 잊어부렀어.

마당에다 앉혀놓고 우리 큰 아부지가 어진다고(어지르다) 애기들도 못 올라오게 하는 양반이 겁나 붕 캐 그 사람들한테 집을 다 넴겨줘 버려, 그란케 그 사람들이 비행기가 뜨면 우루루 정지로 들어가고 우리도 들어가라 하고 비행기가 가불먼 또 나오라하고.

궐기대회가 뭣인지 몰라도 궐기대회 하자고 동네 아그들 다 나오라고 해. 겁나 많애. 그라믄 저드리 앞으로 해서 어산으로 해서 그 수가 밤에 쩌그 청전까지 가서 또 돌아와.

이순경이라고 후퇴를 못해서 잽혔어. 그래갖고 냇가에서 인민재판 한다고 나오라고 그란디 무서운께 나가제 반란군들이 그란께. 나간께 그 총각이었어 이순경이 순천사람이여. 총을 쐈는데 나는 애기를 업고 갔는디 내가 막 그 놈(광경)을 보고 발을 문댔는가 이러고 (땅을) 내리다 봉께 떼가

다 파져 부렀더라고. 내가 그 사람을 알어. 우리 집에서 하숙도 하고. 워매워매 그란디 자기들

남편이 죽은 여자들이 와서 죽은 사람 막 칼질을 하더만. 죽어부렀는디도. 워매 어째 징한가.”

◆경찰 수복 후

“달이 여그만치 올라오믄 그 생각이 딱 나. 그때 그 사람들(경찰)이 왔어. 워매 그래갖고 용산서 우리들이 입을 놀렸으먼 싹 쓸어버렸을 것이여.

나하고 우리 집은 지서 옆이라 동네 사람들이 다 우리 집에 와. 그래서 우리 작은 어메도 오고 우리 성 시누하고 오고 그란디, 순경들이 와서 우리보고 마당으로 싹 나오라고 그래. 그란디 이 잡열의 순경이 나는 요사람 뺨 딱 때리게 하고 저 사람은 내 뺨 딱 때리게 하고 줄줄이 세아갖고 염병을 하네.

그래갖고 그 지랄을 하믄서 부용산에 반란군들이 밥해놔라 이라믄 예에 그랄 가시내라고 나보고그래. 내가 예 그랬다 하드 랑케. 정신이 나가니 그라제.

그란디 우리 아재가 달려와서 순경한테 총을 탁 뺏어 갖고 이 아그가 안골에서 숭한 꼴을 겪고 정신이 없는 아근디 그란 짓거리를 한다고 막 그랑케, (순경이) 그런가 하고 가드만. “

한국전쟁을 이야기 하는 이영남(90세) 할머니
한국전쟁을 이야기 하는 이영남(90세) 할머니

 

◆죽이지 마시오

“임주임이라고 고흥사람인디 그 사람이 지서에 있을 때는 사람 무지하게 죽였어. 죽일 사람들을 잡아다 놓고는 아무개야 이 사람들을 데려왔는디 어짜꺼나 니 말 듣고 죽일련다 그래. (그러면 내가) 이짝 저짝 다 죽이믄 사람 하나도 안 남겄소. 워매 죽이지마소.

용산에서 관산 넘어가는 다리 그 다리 밑에다 너이 죽여 버렸어. 그 우게 냇가로 올라가서는 다섯 명 죽이고 우리 성이 거기서 살아나왔지. 아이구 징해. 먼 죄가 있어서 죽었간디. 그때는 지서라카면 주재소라캐. 거게를 쫒아가 그라믄 그 짝에 죽인 놈들 다 있어.

그라믄 그짝 보믄 막 열이 나그던. (내가 그 사람들 보고) 느그는 안 죽을 줄 알고 그러콤 죄도 없는 사람 죽였냐 그랬어도 우리들이 입 놀려갖고는 하나 사람 안 죽였어. 원수 또지고 또지고 한다고.”(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마을사진:마동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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