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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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1〉
  • 장강뉴스
  • 승인 2022.05.3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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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에 꽃 따러 갔던 열 아홉 총각이 만난 장흥의 독립 운동가들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창전마을
창전마을

 

천관산에 꽃 따러 갔던 열아홉 총각이 만난 장흥의 독립 운동가들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어느 젊은 노인의 구술 생애사를 시작하며

“그라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할 때까지는 집에서 농사를 지었제. 부모 따라 댕김시로 일꾼이 될 판이여.

자작은 여 나무 마지기 밖에 안되는디 남의 소작을 스무 마지기 지었어 (한 마지기를 2백 평으로 보면 4천 평 정도). 현장에서 소작료 받으러 오먼 주라는 대로 줘야 돼. 그래도 그때는 짚이라도 떨어지니 남의 농사라도 많이 지어야 된다 했어.”

애써 지은 농사를 지주에게 턱없는 소작료로 다 빼앗겼던 농민들은 불합리한 소작료를 바꾸자고 농민운동을 하게 되고 지주 3할 소작인 7할이란 개혁안을 따내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장흥 지역의 사람 중에 유재성, 정진수, 문병곤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들은 1933년 장흥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주도하여 그 일로 함께한 동지들과 1934년 구속되게 이른다.

“(내가 일고여덟 때) 재성 씨가 야학 선생하고 그랬어. 종숙이 아부지, 정진수 씨가 (결혼해농께) 처 이숙이제. 이를테면 종숙이 어머니가 우리 장모 동생이여. 이종사촌간. 그냥반이 (우리) 중매를 했제.

그때는 창아지(소갈머리)가 없고 우리 여자(아내) 성이 묘령 살어. 거가 인접을 섰는디 처남들이 뭣허러 여그를 왔냐 그란디 니미 나가 결혼하러 왔제 그란디 동서가 하는 말이 천관산에 꽃따러 왔다 그라라고 동서가 겔챠줘. 그라고 첫날밤에 자도 통 어데 달아보도(만져보지도) 못했어”

고영천
고영천

 

처갓집에서 소위 새신랑 길들이기를 하던 농지거리와 첫날밤 풍경을 재미나게 들려주는 고영찬 씨의 이야기는 아흔 중반을 넘긴 세월과 개인적인 인연들이 엮이어, 예기치 못한 곳에서 덜컥 장흥 독립운동사의 굵직한 얼굴들을 소환한다.

“(결혼하고 해방되기 전 징병 나오라고) 잡으러 댕긴께 묘령 아저씨 되는 분하고 둘이 황해도 겸이포(兼二浦)로 갔어. 거그 우리 아저씨가 또 살어.

도리시바 광산 밑에 관리했는데 그래 거그서 돌 깨믄 담어서 열차 레일 우에다 싣고 가서 깔끄막에다 딱 뒤집어 놓고 (그런 일을 하다가 해방 되고는 황해도에서 한 두 해) 일본 놈들, 남기고 간 관사 관리를 했제”

신부 얼굴은커녕 손도 제대로 달아 보도 못 한 새신랑 고영찬은 가족과 떨어져 황해도

땅에서 외롭고 고된 시간을 보낸다. 징병에 나가 죽는 것보단 나았기에 비슷한 처지인 사람

들과 견디며 47년 5월 드디어 귀성길에 오른다.

고영찬 씨의 생애는 지역사를 관통하는 인물들과의 기억들로도 의미가 크지만, 징용을 피해 이북까지 간 드문 사례로도 구술 사적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제 고향 집으로 돌아온 고영찬 씨. 그를 기다린 것은 가족만은 아니었다. 지역과 사회를 재건하려는 용광로 같은 열기가 들끓고 있던 해방공간에서 젊은 청년이었던 그의 친구들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친구들이 (내가) 월남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왔어. 같이 활동을 하자 그래서 뭔 속인 지 모르고 상황을 보니라고 한 일주일 있응께 협박장이 와 안 나오믄 좋지 못 할것이라고. 그래 가지고 갔제. 시키는 대로 항께 조직책을 맡겨서 유재만 씨가 노동당으로 들라고 해”

이어지는 증언 속에서 우리는 식민지 독립운동과 해방공간, 한국전쟁 전후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연속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얻게 된다.

“유재만이가 기왕의 조직체는 다 땡겨불고 다시 조직을 인민위원장은 누구, 분조 소장은 누구, 농민위원장은 누구 다 정해줘.

그래 국민학교에서 내가 소집을 해갖고 그대로 인쟈 회의를 했제. 백호선 씨라고 (은주마을) 거가 당장(조선노동당 용산면 당장)하고, 쩌그원기 관산가는 길 녹동 지내서 거그 박한주 씨가 인민위원장. 문병곤 씨는 경찰서(장흥 경찰서)에 가 계셨어. 경찰서장”

고영찬 씨가 거명한 지도자급들은 대부분 일본강점기에도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해방공간에서 새 사회 건설을 위해 나서는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유재성 씨하고 유재복 씨 상여는 내가 주관했제. 시신을 찾아 수습해서 인민장으로 했어. (두 사람은) 보도연맹 유치장에 잡아였는디 은쟈 경찰이 후퇴할라 항께 델꼬가서 저 앞바다에다 그냥 물에다 빠쳐불고 산으로 내뺄래 다가 총살에 나갔어.”

유재성과 유재복이라는 장흥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사실 또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장례가 인공시절 면민장으로 치러졌다는 사실을.

“그래갖고 인쟈 민주사회 활동을 하다가 경찰이 진주항께 입산을 한 것이여. 수십명이 올라갔어. (완장차고) 면소재지서 활동하던 사람 다 올라갔어.

경찰이 진주한다 항께 쩌그 장흥인가 어딘가 온다 항께 올라 가갖고. 근디 하룻밤새 거진 다 내려가부러. 한 이십주 있다가 또 내려가부러.

체포된 사람도 있고 자수한 사람도 있는디 최종적으로 너이 있다가 유치 보림사 우에 가지산 송광사란 절에도 있었고, 내중에는 부용산 용샘 밑에 굴에 있었제.

종숙이 성 종희하고 원기 조성렬이하고 너이 하다가 부용산 굴에서 살다가 식량이 없어 내려 보냈더니 마을 사람들이 종숙이 성한테 접근을 해서 즈그 어머니가 알고 딱 끼어갖고 자수 안하믄 나도 죽을란다 그랑께 할 수 없이 자수해 분거여. 그래 산에는 둘만 남았제.

나하고 김용호라고 유동사람이여 나보덤 거도 다섯 살 더 먹었는가 그려”

부용산
부용산

 

50년 9월 부용산으로 입산한 고영찬 씨는 (그의 기억으로는 49년이라고 하나 여러 가지 정황상 50년으로 추정) 52년 2월 자신이 스스로 민주 활동 하산이라고 부르는 자수 시기까지, 1년 반 이상을 소위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이 산 저 산을 전전하고 이 굴 저 굴에 숨어들며,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마지막까지 버티게 된다.

“(입산 초기엔)가자골이라고 있어, 거기서 살았제. 문병곤 씨 김개석 씨 거물들이 같이 있었어. 유재만 씨는 빨치산 4개군 대장인디 우리마을 사람이여 나보다 다섯살 연상인디.

재성 씨 종재여. 재성 씨는 선선한 양반이여. 종제 유재만이하고는 성질이 좀 틀려. 재민 씨는 꿋꿋하재. 재만 씨하고 병곤 씨는 키는 대동할 것인디 덩치는 재만 씨가 안되제.

그라고 밥 묵는 것을 봤지만 문병곤 씨는 밥을 묵으믄 군대 한고(반합) 거기다가 벨도로 밥을 해갖고 많이 묵어. 개석 씨하고 문병곤 씨는 이북 간다고 올라갔는디 도중에 잽혔는가 행방을 몰러.” .

선선한 유재성과 꿋꿋한 유재만... 고영찬 씨의 표현을 듣고 있자면 지역의 역사 속 인물들이 우리 이웃이었음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된다.

“마지막 남은 나하고 김용호도 자수를 하는디, 우리집서 신문치 속에서 사흘동안 있다가, 그때 조부님이 기색을 알고 우리가 온 지를 알어.

밥을 그리 갖다 주고 항께 조부님이 오셔서 짚등속 옆으로 오셔서 아야 느그 방(안사람에게) 좀 가봐라. 오직하믄 그런 말씀 했겄어.

지금 생각하믄 기가 막히제. 같이 내려온 사람이 있는디 내가 뭐 여자 보러 갈 것이여? 조부님은 인쟈 손자 볼 생각으로 얘기를 했거던 그라지만 내가 혼자 갈 생각도 없고 사느냐 죽느냐 하는디.”

여기까지 말을 한 후 고영찬 씨는 눈자위가 붉어졌다. 역사의 옹이를 겪을 때마다 생존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인간적 감정조차 허투루 보일 수 없었을 테다.

그러기에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 보인 그의 젖은 눈망울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평화가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의 회한과 삶의 의지 속에 이루어진 것인가를 더 깊게 느끼게 해 주었다.(글: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드론사진 마동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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