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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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0〉
  • 장강뉴스
  • 승인 2022.05.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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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이 누군고 그랬더니 외갓집 김00 아재가 반란군이더라고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제암산과 장동면 산동마을
제암산과 장동면 산동마을

 

반란군이 누군고 그랬더니 외갓집 김00 아재가 반란군이더라고

1950년 11월 11일 장동면 산동마을사건의 진실을 찾아서

산동마을은 제암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 숨어있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마을이, 제왕광불사 표지판이 서있는 구불구불 포장된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비탈진 곳에 자리 잡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하였다니, 1950년에는 사람이 나무지게를 지고 겨우 걸어 다닐 정도의 산길이었을 것이다.

장동면 하산리 산동(山東)마을은 “6·25전쟁 이전에는 70호 정도가 터를 잡고 살았으나 전쟁 때 마을이 불타고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입주해 들어왔다고 전해온다.” 산동마을의 경우 “6·25전쟁 때 반란군에 의하여 오로지 한 가구만 피해를 입지 않고 모든 집들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장흥문화원, 『장동면지』, 시와사람사, 2005)

산동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장동면지의 기록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경찰에게 비무장민간인 수백 명이 집단학살당한 1950년 10월 2일(양력 11월 11일), 추수가 끝나고 보리밭을 갈던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살아있었다. 그날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총을 맡고 지금도 어깨에 선연한 총탄자국과 함께 살아온 위안심(1942년생)은 분명하게 말했다.

제암산 아래 산동마을
제암산 아래 산동마을

 

이른 새벽, 검은 옷을 입은 경찰들이 몰려와 집에서 쓰던 싸리 빗자루에 불을 붙여, 마을 첫 집이었던 자기 집부터 불을 질렀고, 차근차근 온 동네 집들이 타기 시작했고 단 한 집(보성에서 이사 온 외갓집)만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마을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얼기설기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고. 도대체 그날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어무니 지사(제사)가 음력 시월 초 하랫날. 숨어 있는디 나와라합디다. 그라더니 서이(세 사람을) 마당에 세와놓고 총 쏴분께 딱 죽어붑디다. 죽었는디도 인자 집에서 불을 질러분께 막 집이 내러앉가갖고 우리 어매한티도 가갖고 막 타지고. 엄니랑 같이 죽은 사람이 평화댁인디, 총을 여그 택(턱)을 맞었어. 그래갖고 아조 뒹글고 마당을 돌아댕갰다는디, 우리 엄니는 바로 맞어 죽어부렀는디, 그 사람은 한 열흘 있다가 죽었어. 우리 엄니하고 지사가 열흘 상간이여.

1950년 11월 11일 산동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 하는 자매(뒷줄 왼쪽부터 위안자, 위안심)
1950년 11월 11일 산동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 하는 자매(뒷줄 왼쪽부터 위안자, 위안심)

 

아조 인자 엄니가 죽어갖고 있는디도, 어매 죽었다는 생각 없고, 나만 누가 총 쏴불까마니, 나는 카마니(가만히) 엎졌어 숨도 안 쉬고, 행에나 나도 쥑에불까마니, 그라고난께 경찰들이 지내 갑디다. 머리에 풀 때(위장하기 위해 나뭇가지와 풀로) 같은 걸 꼽고. 그라고 얼마나 있은 께 우리 친정아부지가, 그전에 굴 파놓고 숨어썼는갑디다. 우리는 놔도불고, 죽든지 살든지 놔도불고.(모두 피싯 웃음) 어느 정도 된께 인자 아부지가 왔어. 와서 인자 어매를 묻을라고 본께, 그 동백나무가 땔~삭 큰놈이 있었어, 집자리에가. 거그다 옷을 싸갖고 묻어놨어, 우리 어매가. 그라고 묻고 우리 아부지가 나를 업고, 옛날에는 신작로가 없고 질(길)이었어. 질인디 업고간디, 그 밭에가 아조 사람들 늘피~하든마(셀 수 없이 많이 너부러져) 죽어서.

그란디 그 뒤로 묏이 있었어. 묏이 아니고, 묏도 안 써놓고 반반해, 반반한디 사람이 양신(아주 많이) 들었다 합디다, 거가. 우게, 아래, 우아래다, 우게 아래 밭이여, 두 반디다 묻어놨어. 경찰들이 그랬는거이제, 정녕. 그랑께는 인자 밭을 해묵은께, 조끔썩 조끔썩 조끔썩 늘 파든마, 송장 있는디는 알제마는 거자거자 경운기 간 데로 따라가고 그랍디다. 그라드니 인자 거자 없어졌어, 야튼, 그 묏이.

그때 반란군들이 이 마을에 수백 명 있었제, 그라고 우리 어매가 밥을 해줬어, 반란군들 밥을, 안 해주먼 또 못산디. 소개 당해갖꼬 막 어른들이 합수통으로 들어가불고, 수저떡이라고 그 양반 영감도, 여그서 총을 맞어갖고 쩌그 감나무재 평길이 집있는디 거그서 죽어불고, 그랑께 거그다 묻어불고. 마을주민들이 많이 죽었지라. 막 묏을 여그다 써놓고 저그다 써놓고. 집이 많았제, 인공 지나고도 여그가 삼십 가구, 사십 가구 되았어. ...” (위안자 1945년생)

“반란군이 누군고 그랬더니 외갓집 김00이 아재가 반란군 아니냐, 그래갖고 인자 아침에 인자 일찍허니 밥 묵고 산으로 올라가불고 저녁에는 마을로 내려오고 그랬든갑디다. 그랬는디 음력으로 시월 초 이튿날 보리를 갈라고, 우리 아부지는 생전 놉을 얻어서 일을 하먼 아침밥을 믹이거든요. 우리하고 세 집 식구 보리 갈라고 밥 묵은디 그냥 무어시 그냥 퉁탱퉁탱 하더니, 어찌끔 총알이 그냥 퉁탱퉁탱 해갖고, 아부지들은 어디로 숨어불고 없습디다. 세살문인디 안 열어둘라고 그냥 어매들은 문을 잡고 있고. 장흥경찰서에서 그렇게 와갖고 우리 집이가 첫 집이라 딱 들와서 문을 안 열어준께 문창살로 총을 탁 쑤심시로 쏘아분단께 인자 열어줬제.(위안심 1942년생)

1950년 11월 11일 산동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의 집단학살매장지를 가르키는 위안자(왼쪽)
1950년 11월 11일 산동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의 집단학살매장지를 가르키는 위안자(왼쪽)

 

두 자매의 기억은 총총했다. 어머니와 마을 어매들이 죽은 현장에 있었고, 겨우 살아난 경우라 그 기억은 지금까지 몸을 칭칭 감고 있을 터였다. 동생은 죽은 듯이 어머니 옆에서 숨도 안 쉬고 있었고, 언니는 총을 어깨에 맞아 외갓집에서 늙은 호박 속살을 바르고 상처를 치료했다.

정00(장평 삼정마을)는 그날 작은아버지 정00가 장동면 산동마을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후 늦게 집안 어른과 함께 산동으로 걸어 들어갔다. 집안 어른이 수많은 시신을 뒤집어 확인하다가 양복을 입고 계곡에 죽어있는 작은아버지를 발견하고, 이내 시신을 이고지고 장평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작은아버지는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장평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경찰에 쫒기는 신세였다. 작은아버지의 처남 임00이 마침 산동으로 입산한 상황이라 그곳으로 들어가 하루 이틀 만에 그 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문(장평 임리마을)는 집안 형님 문00이 산동에서 발뒤꿈치에 총을 맞고 피신해 여러 사람들과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것을 기억했다. 그들 가운데는 피를 흘리는 사람이 여럿이었고, 따발총을 든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집안 형님인디, 그때 당시 광주서 고등학교 댕겼어, 그때 당시 고등학생이라먼 흰쌀에 뉘(겉껍질 안 벗긴 나락 알갱이)여, 드물어 없어...우리집 사랑방이 크닌까 모도 주둔을 했는데, 소밥 끊이는 거 여물 솥, 큰 거 솥이 있어. 거그를 깨끗하니 씨쳐갖고는 밥을 해갖고 묵고. 지금 눈에가 빤하요.”

위안심의 총탄 자국-1950년 11월 11일 이른 아침 산동마을에서 경찰에게 총을 맞았다.
위안심의 총탄 자국-1950년 11월 11일 이른 아침 산동마을에서 경찰에게 총을 맞았다.

 

이때 살아남은 위안심과 동생 위안자의 기억에 따르면, 대밭에는 불에 탄 사람들이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있었고, 길 가 양쪽 밭과 계곡에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너부러져 있었는데, 마치 죽은 오리들이 쌓여 있는 것처럼 흐갰다고(하얗다)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일까.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산동에서 벌어진 일은 장흥군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수십 명의 마을주민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 수백 명이 죽어갔다. 그들 대부분은 일가친척 장흥사람들이겠지만 이른바 “완도빨치산”이라 불렀던 완도사람들도 있었다.

총기를 들고 있던 소수의 이른바 “빨치산유격대”는 전투력이 뛰어나 대부분 살아남았을지 모르지만, 경찰에 쫓겨 입산한 비무장민간인들은 대부분 경찰에게 사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들의 원혼을 해원하고 진혼의 굿을 한바탕 펼쳐야 할 때가 왔다. 1950년 음력 10월 1일이 제삿날인 사람을 찾고 있다.(글: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드론사진 마동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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