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장평면 임리, 두봉, 녹양, 내동마을 열한 사람 제삿날이 같은 까닭이
-빨치산의 민간인 학살사건-
1949년 음력 1월 20일 밤, 임리에 사는 열한 살 문장호의 집안에서는 할머니 제사가 있어 분주했다. 조금은 넉넉한 집안이었기에 떡이며 고기며 생선을 제사상에 차렸다. 장호는 평소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인지라 자정을 넘기려고, 감기는 눈을 비비며 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밤손님들이 떼로 몰려왔다. 그들은 아직 제사도 지내지 않은 음식을 염치도 없이 우걱우걱 먹어치웠다.
밤손님(빨치산)들이 물러간 후 다시 제사상을 차리고, 장호의 어머니와 당숙모는 제사상에 올릴 물을 길으러 마을우물터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우물로 가기 전 논둑 아래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 장면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날 밤 빨치산들은 택호가 안동양반이었던 마을이장 문00과 문영기(1901년 생), 문형종(1927년 생) 부자(父子)를 대창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장호가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빨치산들이 문영기의 집으로 들이닥쳐 두 부자를 다짜고짜 마을 앞으로 끌고나갔다고 한다. 이에 문영기의 동생 문점만(1906년 생)이 따라 나서 애원하며 형과 조카를 살리려고 했으나 “너까지 안 죽으려면 가만있어라” 하며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가족과 마을사람들이 현장에 가보니, 문형종은 아직 숨이 붙어 있어 집안으로 옮겼으나 다음 날 아침 죽고 말았다. 그 당시 형종은 경찰시험을 합격한 후 집에서 잠깐 쉬고 있었다. 그 일로 문영기의 처 정군심은 심한 충격을 받고 입이 돌아가 버려 생애 내내 그 상태로 살았다.
그날 밤의 비극은 단지 임리마을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이웃한 두봉마을에서도 민간인 두 명이 빨치산에게 학살당했다. 또한 내동마을에서는 세 명, 녹양마을에서도 세 명이 똑같은 방식으로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했다.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948년 10월 국군 제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고 봉기하자 각 지역의 좌익세력들이 동조했다. 하지만 곧바로 군경에게 밀려 주력부대는 지리산으로 입산했고, 일부 14연대 군인들이 화순과 장흥 쪽으로 들어오면서 그 여파가 장평에도 들이닥친 터였다.
화순 화학산을 거쳐 들어온 14연대 반란군들은 산악지역인 유치와 장평지역 빨치산들과 연대하여 이곳저곳에서 웅거하며, 밤이면 가까운 산중마을로 출몰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14연대 군인 한 명이 고향 어머니가 그리운지, 자수를 하려는지 혼자 진산을 거쳐 두봉 쪽으로 내려왔다. 그는 총을 깊은 골창에 던져버리고 내려오던 참이었다.
그 당시 두봉마을 송00(1901년 생)은 그 아래 계곡에서 물레방앗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추레한 몰골을 한 군인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수상하게 여기 송00은 경찰에게 신고를 한다. 이에 경찰이 그 군인을 체포하여 사살한다.
1949년 음력 1월 20일 깊은 밤, 두봉마을 송00의 집에 대여섯 명의 빨치산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마침 송00은 집을 비운 상태였고, 집에는 그의 장남 송완규(1926년 생)가 있었다. 송완규는 해방 전 일본 제일상업학교에 유학했었다. 학자금 관계로 일시 귀향 했다가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집에 머물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집안을 뒤졌으나 송00을 찾지 못하자 그 대신 송완규를 끌고 가 진산리 신덕마을 앞 장구배미 골짜기에서 학살한다. 송00은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마을앞산에 가매장했다가 이후 진산 넘어가는 가의재 인근 선산에 모신다. 한국전쟁 당시 대살(代殺)은 좌우익을 떠나 무참하게 이뤄졌던 것이다.
한편 같은 날 외가가 송 씨 집안이었던 두봉마을 이장 안철순도 빨치산에게 학살당한다. 또한 똑 같은 날 이웃한 마을인 내동에서 세 명이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같은 날 녹양리에서도 박승균과 박우균, 백우선이 박승균 집 마당에서 죽창에 찔려 학살당한다.
장평은 산중이라 그 당시 낮이면 경찰이 들어오고, 밤이면 빨치산이 출몰하여 양쪽에서 온갖 고통을 당하던 때였다. 그런데 한날한시에 이렇게 빨치산이 네 개 마을에 내려와 각 마을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산중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빨치산들은 가까운 마을에서 쌀과 음식을 조달하는 이른바 ‘보급투쟁’을 했다. 이 와중에 빨치산들은 협조를 거부하거나 경찰에게 신고를 하는 ‘인민’들을 본보기 반동으로 몰아 무참하게 학살했다. 또한 빨치산 가운데는 그 마을사람들도 여럿 있어 마을 사정을 잘 알뿐더러, 평소에 감정이 있던 사람에 대한 원한도 작용했을 것이다.(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사진:마동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