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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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17〉
  • 장강뉴스
  • 승인 2022.04.25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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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면 임리, 두봉, 녹양, 내동마을 열한 사람 제삿날이 같은 까닭이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두봉리 마을전경
두봉리 마을전경

 

장평면 임리, 두봉, 녹양, 내동마을 열한 사람 제삿날이 같은 까닭이

-빨치산의 민간인 학살사건-

1949년 음력 1월 20일 밤, 임리에 사는 열한 살 문장호의 집안에서는 할머니 제사가 있어 분주했다. 조금은 넉넉한 집안이었기에 떡이며 고기며 생선을 제사상에 차렸다. 장호는 평소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인지라 자정을 넘기려고, 감기는 눈을 비비며 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밤손님들이 떼로 몰려왔다. 그들은 아직 제사도 지내지 않은 음식을 염치도 없이 우걱우걱 먹어치웠다.

밤손님(빨치산)들이 물러간 후 다시 제사상을 차리고, 장호의 어머니와 당숙모는 제사상에 올릴 물을 길으러 마을우물터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우물로 가기 전 논둑 아래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 장면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임리 마을전경
임리 마을전경

 

그날 밤 빨치산들은 택호가 안동양반이었던 마을이장 문00과 문영기(1901년 생), 문형종(1927년 생) 부자(父子)를 대창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장호가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빨치산들이 문영기의 집으로 들이닥쳐 두 부자를 다짜고짜 마을 앞으로 끌고나갔다고 한다. 이에 문영기의 동생 문점만(1906년 생)이 따라 나서 애원하며 형과 조카를 살리려고 했으나 “너까지 안 죽으려면 가만있어라” 하며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가족과 마을사람들이 현장에 가보니, 문형종은 아직 숨이 붙어 있어 집안으로 옮겼으나 다음 날 아침 죽고 말았다. 그 당시 형종은 경찰시험을 합격한 후 집에서 잠깐 쉬고 있었다. 그 일로 문영기의 처 정군심은 심한 충격을 받고 입이 돌아가 버려 생애 내내 그 상태로 살았다.

그날 밤의 비극은 단지 임리마을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이웃한 두봉마을에서도 민간인 두 명이 빨치산에게 학살당했다. 또한 내동마을에서는 세 명, 녹양마을에서도 세 명이 똑같은 방식으로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했다.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948년 10월 국군 제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고 봉기하자 각 지역의 좌익세력들이 동조했다. 하지만 곧바로 군경에게 밀려 주력부대는 지리산으로 입산했고, 일부 14연대 군인들이 화순과 장흥 쪽으로 들어오면서 그 여파가 장평에도 들이닥친 터였다.

화순 화학산을 거쳐 들어온 14연대 반란군들은 산악지역인 유치와 장평지역 빨치산들과 연대하여 이곳저곳에서 웅거하며, 밤이면 가까운 산중마을로 출몰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14연대 군인 한 명이 고향 어머니가 그리운지, 자수를 하려는지 혼자 진산을 거쳐 두봉 쪽으로 내려왔다. 그는 총을 깊은 골창에 던져버리고 내려오던 참이었다.

그 당시 두봉마을 송00(1901년 생)은 그 아래 계곡에서 물레방앗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추레한 몰골을 한 군인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수상하게 여기 송00은 경찰에게 신고를 한다. 이에 경찰이 그 군인을 체포하여 사살한다.

임리 자택에서, 왼쪽 문홍천 씨 부부(피해자 문영기, 문형종 후손)
임리 자택에서, 왼쪽 문홍천 씨 부부(피해자 문영기, 문형종 후손)

 

1949년 음력 1월 20일 깊은 밤, 두봉마을 송00의 집에 대여섯 명의 빨치산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마침 송00은 집을 비운 상태였고, 집에는 그의 장남 송완규(1926년 생)가 있었다. 송완규는 해방 전 일본 제일상업학교에 유학했었다. 학자금 관계로 일시 귀향 했다가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집에 머물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집안을 뒤졌으나 송00을 찾지 못하자 그 대신 송완규를 끌고 가 진산리 신덕마을 앞 장구배미 골짜기에서 학살한다. 송00은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마을앞산에 가매장했다가 이후 진산 넘어가는 가의재 인근 선산에 모신다. 한국전쟁 당시 대살(代殺)은 좌우익을 떠나 무참하게 이뤄졌던 것이다.

한편 같은 날 외가가 송 씨 집안이었던 두봉마을 이장 안철순도 빨치산에게 학살당한다. 또한 똑 같은 날 이웃한 마을인 내동에서 세 명이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같은 날 녹양리에서도 박승균과 박우균, 백우선이 박승균 집 마당에서 죽창에 찔려 학살당한다.

진산리 신덕마을 앞에서,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문락성(86세), 문장호(85세), 송정식(74세, 피해자 송완규 아들)
진산리 신덕마을 앞에서,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문락성(86세), 문장호(85세), 송정식(74세, 피해자 송완규 아들)

 

장평은 산중이라 그 당시 낮이면 경찰이 들어오고, 밤이면 빨치산이 출몰하여 양쪽에서 온갖 고통을 당하던 때였다. 그런데 한날한시에 이렇게 빨치산이 네 개 마을에 내려와 각 마을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산중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빨치산들은 가까운 마을에서 쌀과 음식을 조달하는 이른바 ‘보급투쟁’을 했다. 이 와중에 빨치산들은 협조를 거부하거나 경찰에게 신고를 하는 ‘인민’들을 본보기 반동으로 몰아 무참하게 학살했다. 또한 빨치산 가운데는 그 마을사람들도 여럿 있어 마을 사정을 잘 알뿐더러, 평소에 감정이 있던 사람에 대한 원한도 작용했을 것이다.(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사진:마동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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