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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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⑭
  • 장강뉴스
  • 승인 2022.03.2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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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금희의 전쟁 이야기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아직 끝나지 않은 금희의 전쟁 이야기

장흥읍을 빠져나가 관산읍을 지나 천관산 방향으로 가다가 저수지를 끼고 농안(農安)마을로 들어서니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듯 하다. 마을이 천관산 품속으로 들어와 있는 형상이다. 저수지에는 천관산에서 흘러들어온 맑고 차가운 물이 가득하다. 마을 앞에 펼쳐진 논과 밭을 저수지로 만든 지는 육십년 가까이 되어서 원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이제는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관산읍 농안마을, 제공: 마동욱

농안댁 이금희할머니(가명, 1943년생. 이후 생략)는 오랜만에 와보는 고향 마을 저수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시집간 마을이 지척이건만 여기까지 오기가 쉽지 않다.

“저그여 저그. 저그 우리 할머니랑 아부지 묘소가 있당케”

할머니의 주름진 손끝을 따라가보니 과연 저수지 건너편으로 묘지가 보인다.

이금희할머니의 아버지 이영기(가명, 1910년생)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장흥을 점령한 지방좌익들이 길에서 만나자마자 끌고 가버렸다. 농안마을에서 땅 꽤나 가지고 있는 ‘지주’이니, 전쟁통에 위험하니 보호해준다는 이유였다.

몇날 며칠을 찾아 헤맸는데 이영기씨의 행방은 못 찾았다. 결국 국군들이 장흥에 다시 진주를 하고 난 뒤에 시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옷을 보고 겨우 찾았다. 이영기씨의 누나이자 이금희할머니의 고모가 시신들 속을 찾아 헤매어 그나마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관산읍 농안마을, 제공: 마동욱
관산읍 농안마을, 제공: 마동욱

이씨 집안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좌익들에게 잡혀간 큰아들이 장흥 어딘가에 갇혀있다는 소문을 들은 평촌댁(이영기의 어머니)는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어 갈아입을 옷을 챙겨 자울재를 넘었다.

그 사이 해가 저물어 아들이 갇혀있는 곳을 수소문하기 힘들어 자울재 아래 있던 순지마을에서 하룻밤 잠을 자고 아침에 읍내에 가보기로 했다. 순지마을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하룻밤 재워달라고 청을 하였지만, 쉽게 방을 내주는 이가 없었다.

이 마을 저 마을 할 것 없이 흉흉한 일들이 벌어지던 때라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거였을까. 그래도 겨우 한 집에서 인심 좋은 주인이 아랫방을 내줘서 애써 오지 않은 잠을 청하며 아들을 찾을 마음을 다지고 있을 때였다.

마을에 낯선 여자가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있던 좌익세력들에게 들어갔는지 갑자기 마당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주인집 내외에게 아랫방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따지고 물었고, 주인집 내외는 그냥 아는 친척이라고 둘러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평촌댁이 잠든 방문도 덜컥 열렸고 마당 한 가운데로 끌려나갔다. 어디서 온 누구냐고 윽박지르는 이들에게 평촌댁은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한쪽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주인집 내외에게 피해가 갈까 그랬을까. 아들도 보호해준다고 데려갔다니 설마 무슨 일이야 있을까 싶었을까.

평촌댁의 이야기를 들은 좌익 세력의 젊은 남자들은 평촌댁을 끌고 순지마을 앞 탐진강변 냇가로 끌고 갔다. 그 냇가에서 돌로 맞아서 돌아가셨다는 평촌댁의 시신은 집안 식구들이 겨우 수습하였다.

장흥읍 순지마을 탐진강변, 사진: 마동욱
장흥읍 순지마을 탐진강변, 사진: 마동욱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이삐고 고왔는지 지금도 얼굴이 생각나”

농안댁 이금희할머니는 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추우세요?”

“아녀. 그때 생각허니께 떨리네”

그렇게 죽었어도 어디 가서 말 한마디도 못할 때였다. 땅뙈기 좀 있다고 ‘지주’와 ‘반동’으로 분류되었으니 죽어도 마땅한 처지였다.

농안마을에 상주하던 좌익세력들은 마을 사정으로 마을 아이들을 다 불러모았다. 마을 아이들에게 인민군들이 부르는 노래를 가르쳐주면서 ‘지주’로 분류된 집 아이들은 따로 모아 옆에 세워두었다. 벌을 서듯 서서 다른 아이들이 그늘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비행기 공습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자기들은 몸을 숨기면서 ‘지주’와 ‘반동’ 아이들은 비행기에서 훤히 보이는 공터 한 가운데에 세워두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무섭고 떨리고 서러웠는지 할머니는 봄햇살 아래에서도 몸을 떨었다.

농안 마을 입구를 들어서자 할머니는 마을 공동샘부터 찾았다.

마을 노인정 바로 앞에 있다던 마을 공동 샘은 보수 공사를 했는지 예전 모습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다리가 아파 계단을 내려가지 못한 채 앉았다.

“저그 내려가봐. 거그서 쪼깨 뒤로. 아니 거그서 옆으로 두 발 더 가봐. 그려, 그 자리여”

이금희할머니는 샘 언저리에 한 지점을 정확히 짚었다. 그곳은 이금희할머니의 작은아버지 이영동씨(가명, 1919년생)이 경찰들에 의해 물고문을 당하고 몽둥이찜질을 당하면서 죽어간 장소였다.

가을이 되자 어느 날 갑자기 좌익들이 산으로 숨어들더니 군인들과 경찰들이 다시 장흥으로 들어왔다.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이금희할머니의 작은아버지 이영동씨는 1950년 음력 추석 직후에 집안일 해주던 일꾼들과 마을사람들 몇 명을 모아 퇴비작업을 진행했다.

하루 종일 같이 일한 사람들에게 저녁밥을 해먹이고 나니 해가 졌다. 설거지하기엔 힘든 하루였기에 부엌에 그냥 들여놓고 잠들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 누군가가 이영동씨가 ‘산사람들한테 밥을 해줬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동네 사람 몇 명한테만 물어봐도 사실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경찰은 무슨 일인지 그대로 이영동씨를 집에서 끌고나가 마을 노인정 앞 공동 샘 앞으로 데리고 갔다.

경찰은 그 샘 앞에서 이영동씨를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물을 코로 들이붓는 등 고문을 자행했고, 의식을 잃고 숨이 넘어가게 생기자 데리고 가라고 내팽개치고 가버렸다. 끝내 이영동씨는 목숨을 잃었다. 이금희할머니네 집안은 좌익세력과 경찰 양쪽에게 다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결과가 된 것이다.

관산읍 농안마을 마을회관 앞 공동 샘
관산읍 농안마을 마을회관 앞 공동 샘

“전쟁 끝나고 학교에서 내가 우리 할머니가 돌 맞아 죽는 그림 그려서 냈는디 잘 그렸다고 상도 받았제라. 동네 앞에서 우리 집안 굿도 했는디 그때 그 무당이 그 샘앞에서 우리 작은아버지 원혼이 들어서 우리 엄마 붙들고 자기 한 좀 풀어달라고 막 소리지르고. 꼭 작은아버지같았당께”

“우리 엄마가 혼자 4남매를 키웠을껭 고생이 많았제. 동네 할머니들이 그때 우리집에 와서 많이 같이 자고 그랬제. 허도 험한 일이 많았응께 우리 엄니 거시기한다고”

네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전쟁통에 같이 홍역을 겪은 여인네들은 하루아침에 남편도 잃고 의지할 시어머니도 잃은 여자가 어린 4남매를 두고 혹시나 다른 마음을 먹을까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며 한 세월을 살아간 것이다.

전쟁이란 이런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총을 든 적으로 돌변하기도 하고, 또 전쟁을 함께 겪은 동병상련의 이웃으로 돌려놓기도 하는 것이다. 한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서로의 생로병사를 다 지켜보던 이웃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야기는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다.

이금희할머니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봄이 왔지만 한기가 들어 부르르 몸이 떨리는 것처럼.(제공:(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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