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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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⑬
  • 장강뉴스
  • 승인 2022.03.1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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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유치면 대리 민간인 희생 사건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원대리 새마을회관 앞에서-수몰되기 전(사진제공 : 마동욱)
원대리 새마을회관 앞에서-수몰되기 전(사진제공 : 마동욱)

장흥 유치면 대리 민간인 희생 사건

장흥군 유치면은 산악지대로 가지산이 위치해 있고 이는 영암군과 경계인 국사봉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가 되어 빨치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과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유치 길목에 위치한 대리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대리에 살았던 문수남(가명, 1933년생)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1950년 봄과 가을에 성격이 다른 두 사건이 발생한다.

원대리-수몰되기 전(사진제공 : 마동욱)
원대리-수몰되기 전(사진제공 : 마동욱)

“별일 다 있었어, 해주라고항깨 할 수 없이 해줬지, 그란디 백주대낮에 뜬금없이 차가 들어와, 군인들인데 뭔 놈의 군인들이 일본 칼 니뽄도를 차고 댕겨, 3월인가 4월인가 돼야, 보리가 삐쭉삐쭉 나올 때인디 논에다 쭈그려 앉혀 놓고 안식이 아재 논이여, 농협분소 앞에 있는 논인디 마을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바로 니뽄도로 이장의 목을 쳐 부러, 힘깨나 쓰는 젊은이들은 모두 끄집어 내어 니뽄도로 허벅지 같은 데를 푹푹 찔러 불고, 그리고 집을 다 불 질러 부렀어, 마을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렸재. 소문에 원00 장군 부대라고 했어 사람들이, 죽은 이장은 부산아재라고 불렀는디 이름이 연호라고도 했고 대호라고도 했어.”

1950년 3월 어느 날, 유치면 대리마을에 군인들이 탄 트럭이 도착한다. 그들은 무장한 군인들이었으며 일부는 일본 칼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덤재를 넘어오면서 마을주민에게 ‘한대리’라는 마을의 위치를 물었다.

한대리로 알고 원대리를 찾아온 군인들은 위협을 가하며 마을사람들을 농협분소 앞 논에 모이게 한 후 마을 전체에 불을 질러 버린다. 끌려나온 마을사람들은 논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당시 논바닥은 벼를 베고 난 모폭지에 서릿발이 뽀짝하게 올라 있을 때였다.

무장한 군인들은 마을사람들을 향해‘한대리’는 반란군과 내통하여 그들에게 식량과 집을 제공하였고 그들의 손에 덤재에서 문00 면장과 유치지서 경찰이 살해당한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적극 가담한 자를 찾아내어 처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유치면 원대리-수몰되기 전(사진제공 : 마동욱)
유치면 원대리-수몰되기 전(사진제공 : 마동욱)

군인들은 바로 이장을 호명하였고 이장이 앞으로 나오자 허리에 차고 있던 긴 칼을 빼어 들어 이장의 목을 단 칼에 베어 버렸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참혹한 일에 마을사람들은 경악했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참혹하게 이장을 살해한 군인들은 마을에서 힘 깨나 쓰는 젊은 사람들을 하나 둘 불러낸다. 허벅지에 칼을 푹푹 찌르는 악행이 계속되자 여기저기에서 마을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곳은 한대리가 아니라 원대리다,‘원대리’를 ‘한대리’로 착각했다.” 자식들이 하나둘 불려 나가고 칼에 찔려 픽픽 꼬구라지자 마을사람들이 한목소리를 낸 것이었다.

뒤늦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 챈 군인들은 이미 잿더미로 변해버린 마을을 남겨 둔 채 아무런 조치 없이 마을을 빠져 나갔다.

한편, 한마을에 살았던 문00과 문00 두 일가의 사건 또한 비참하고 끔찍하다. 당시 두 사람은 유치면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는데 면사무소 직원들도 좌·우익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있었다.

특히, 두 사람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판단한 좌익 쪽에서는 그들을 반동으로 지목하고 빨치산의 힘을 빌어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 낌새를 눈치 챈 문00과 문00은 해가 떨어지면 집을 나와 은신처로 숨어 들었고, 집에는 어머니와 처와 아이들만 남아 밤새 불안에 떠는 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원대리 망향비 앞에서(사진제공 : 마동욱)
원대리 망향비 앞에서(사진제공 : 마동욱)

1950년 10월 28일(음력 9.18.) 밤, 유치면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은 은밀하게 마을에 내려온다. 일부는 식량 확보를 위해 흩어졌고 일부는 문00과 문00의 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빨치산은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들을 찾지 못하자 그 분풀이로 남아있던 가족들을 끌고 갔다. 문00의 집에 있던 어머니 홍혜원(가명,1901년생)과 처 백미순(가명,1925년)은 자고 있던 갓난아기까지 깨워 들쳐 업고 따라 나섰다.

설마 애기 업은 아녀자까지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문00의 집에서도 어머니와 며느리가 끌려 나왔다. 대리에서 단산 넘어가는 골짜기인 댓재까지 끌고 간 빨치산은 데리고 간 애기들까지 포함하여 가족 전체를 살해하였다. 반동의 가족이란 명목이었다.

다음 날, 끌려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자 마을 사람들이 찿으러 나섰다. 댓재 골짜기에서 시신을 발견하여 살펴보니 여기저기 죽창으로 찔러 잔인하게 죽인 흔적이 보였다. (제공:(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원대리 망향비(장흥군 유치면 장곡재)
원대리 망향비(장흥군 유치면 장곡재)

■망향비(원대리)

저 앞에 보이는 내접산과 중군봉 아래 큰몰과 상방촌을 합하여 원대리가 있었다네 . 수인산과 예천의 정기어린 이곳은 옴천천을 중심으로 땅들, 뒷들, 서답들을 일구며 큰 어려움 없이 착하고 순박하게 살았지. 평화로운 이곳에 탐진댐을 건설한다는 청천병력같은 소리에 넋을 잃고 몸부림치다 실향의 한을 안고 한집, 두집,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지. 선조들이 잡아준 동네 터, 들길, 산길, 물속에 다 묻고 여기 장고재까지 올라와 고향을 기리는 마음 둘 데 없어 모두는 망향비가 되어 버렸다네. 고향을 함께했던 이들이여! 내 살던 집 보고 싶고 그리울 때면 이곳 망향비 동산에 올라와 고향노래 부르며 재기의 환성을 기원하세. 우리들의 삶과 추억 그리고 그리움의 정표로 마을사람들의 뜻을 모아 여기 이곳에 망향비를 세웠다네.

서기 2002년 3월

대리1구 주민일동 세움-글 문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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