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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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⑩
  • 장강뉴스
  • 승인 2022.02.2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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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안양면 동계마을 백인성 씨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장흥군 안양면 동계마을-사진 마동욱 작가
장흥군 안양면 동계마을-사진 마동욱 작가

 

16살 학생은 어떻게 빨치산이 되었을까

해방, 드디어 해방!

꿈에 그리던 해방이 되었다. 자다가 일어나 앉아 꿈인가 싶기도 한 날들이었다.

해방되던 해에 16살이 된 백인성(가명, 이후 생략)은 1929년생.

태어나보니 일제가 나라의 주인이었고 일제의 지배와 통치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고향을 떠나 광주사범학교에 오기 전까지. 동네 사람들 집에서 쌀이며 솥단지까지 뺏어가는 모습을 보거나 일제 순경들의 폭력을 마주치면 화가 나긴 했지만, 그때는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폭력도 일상이 되고 착취도 일상이 되면 익숙해지는 것이다.

장흥 안양면 동계마을에서 300년이 넘도록 터전을 잡은 양반집에서 태어나 그림도 좋아하고 오르간도 잘 치며, 시 짓기도 좋아하는 영특한 장남은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당시에 근처에서 제일 좋은 학교인 광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사범학교에 입학해서 만난 세상은 자신이 알던 세상과 너무나 달랐다. 자신이 태어나던 해에 있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으면서, 일제의 총칼에 맞선 선배들 이야기는 마치 무용담 같았다.

만주 어딘가에서 총 들고 싸우고 있다는 독립군 이야기도,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전설 속의 영웅이었다. 난공불락인 것 같던 일제는 곧 패망을 앞둔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으며, 당연하게 여겨졌던 일제의 지배를 거부하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무들과 독서회를 하면 할수록 조선의 독립은 너무도 간절해졌으며, 새로운 나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어린 학생 백인성을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그때부터 백인성은 일제와 학교의 이른바 ‘불령선인’ 명단에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해방이 된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펼쳐진다는 기대에 온 나라는 들끓었다.

하지만 기대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하였고, 다시 인민들은 굶주렸다. 학생 백인성은 광주사범학교에서 제적되었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집안 어른들의 실망과 걱정이 컸지만 정작 본인은 실망하지 않았다.

백인성이 장흥고등학교 1학년으로 편입하자마자 전쟁이 터졌다. 남도 끝자락에 있는 장흥도 좌우 세력 모두 요동쳤다. 어느 날 고모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백인성의 아버지는 아들 백인성에게 고모부 장례에 대신 가라고 한다.

훗날 백인성은 자신이 그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면 자신의 운명이 달라졌을 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고택 한 채가 잘 보존중인 백인성의 생가-사진 마동욱 작가
고택 한 채가 잘 보존중인 백인성의 생가-사진 마동욱 작가

백인성의 고모부 마상원(가명)은 장흥 안양면 장수마을에 살던 이였는데 미 군정 경찰들이 다 모이라고 하는 회합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고령 위반죄로 목포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했다. 그런데 그 이유로 1950년 초 장흥 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되었고, 6·25전쟁이 나자 수문 앞바다에 끌려가 수장되었다.

장수마을 장례식에 가보니 고모는 거의 정신이 나가 실성한 듯 보였고, 어린 두 아이를 보자니, 백인성의 눈에도 불꽃이 일었다. 이런 무자비한 살인행위를 벌인 이승만정권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일은 백인성의 고모부만의 일이 아니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백인성의 집안일을 하던 앞집 이웃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경찰이 대문 앞에서 삽으로 때려 철사줄로 묶어 잡아갔고, 이후 수문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장흥의 마을마다 생긴 이 비극적인 사건은 청년 백인성의 인생을 바꿔버린다. 백인성은 그때 이후 자연스럽게 장흥의 좌익세력들과 뜻을 함께 하게 된다. 좌익세력들이 장흥을 장악했을 당시, 백인성이 학교운동장에서 똑똑하고 멋진 정치연설을 하던 그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어느 날 경찰과 국군이 다시 장흥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흉흉하던 때, 학교에서 돌아온 백인성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서둘러 옷만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그 이후 집안 식구들은 백인성을 만나지 못했다. 경찰이 다시 장흥을 장악했고, 좌익세력에 협조했던 이들이 소리 소문 없이 죽던 시절이니 차라리 연락이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장남인 백인성이 좌익세력이 되어 학교에서 제적되고, 기어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백인성의 아버지는 절망에 빠졌다. 백인성의 동생인 차남은 중학교에 보내지도 않았다. 똑똑한 장남을 괜히 공부 시킨다고 상급학교에 보내서 좌익사상에 물들었나, 자책하였다. “가르쳐봐야 좌익이나 된다”며 가슴을 치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행방이 묘연해진 청년 백인성은 1952년 유치 가지산에서 발견되었다. 영암토벌대가 진압하던 과정에 다리에 총을 맞은 채 잡혔고, 장흥경찰서로 넘겨져 유치장에 갇혔다. 장흥경찰서장은 영리한 백인성을 유치장에서 불러내 이런 저런 일을 시켰다.

글 모르던 경찰들도 많았던 시절이라 백인성에게 통역도 시키고 글도 받아 적게 했다. 영특한 백인성이 아까운 생각이 든 경찰서장은 백인성에게 경찰이 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곤 산에서 잡힌 백인성을 유치장에서 풀어주기까지 했다.

백인성은 집으로 돌아와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3년 동안 산에서 동지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나눴는데, 그 동지들을 때려잡는 경찰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던 백인성은 해남에 있는 장흥경찰서장의 집까지 찾아갔다.

“도저히 경찰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백인성을 바라보던 경찰서장은 그의 말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 다른 제안을 한다. 경찰 대신 군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 제안 또한 그에게는 정말 피하고 싶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빨치산까지 했던 그 때문에 벌써 가족들이 이미 많은 피해를 봤으며, 부모님들의 간절한 소원도 더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서 군인으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장흥에서 경찰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으로 위안 삼을 수밖에 없었다.

고택 한 채가 잘 보존중인 백인성의 생가-사진 마동욱 작가
고택 한 채가 잘 보존중인 백인성의 생가-사진 마동욱 작가

 

부모님들이 아들의 마음을 붙잡고자 혼인을 서둘렀고, 그렇게 그는 결혼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군대에 가기 전 뱃속에 잉태되었던 큰아들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제대를 했다. 제대한 이후 백인성은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는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평생을 연좌제로 인해 가슴을 졸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과 친인척들의 앞길에 자신의 청춘이 큰 걸림돌이 될까 싶었다. 남들이 모르게 좌익활동을 하다 사망한 이들의 유가족들을 돕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가면서 살았다. 시를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며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청년 백인성은 그렇게 누룩 사업가 백인성으로 나이가 들어갔다.

이후에 큰아들이 장성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을 때 백인성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본인이 못 이룬 청춘의 꿈을 대신 이뤄준 아들을 지켜보며 자신의 청춘을 뒤돌아봤을 것이다. 그렇게 시대를 잘못 만난 청년들은 이제 세상을 떠났고,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도 이제 기억하는 이들이 없다.

이념이 폭력으로 변질되고 더 큰 힘을 갖고자 하는 욕망은 전쟁으로 부딪힌다.

어제 지구 한 편에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났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남은 아버지가 딸을 기차에 태워 멀리 보내는 사진이 눈에 밟힌다. 그 전쟁은 또 어떤 청춘들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며, 수많은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후대의 후대에까지 너무도 고통스러운 상처와 왜곡, 고통을 남길 것이다. 아직도 한국전쟁 당시 피해자들의 유족들과 후손들이 겪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평화는 생명이며 안전이다.

오늘 우리의 염원도 평화!(제공 : 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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