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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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⑨
  • 장강뉴스
  • 승인 2022.02.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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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면 우산리 민간인 희생 사건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사람 한나가 풀만도 못해, 목심이”

장평면 우산리 민간인 희생 사건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의 침묵 속에 접근을 거부하는 영역들이 산 넘어 산이다. 이제 겨우 문턱을 넘은 우리는 그 산을 넘고 또 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커다란 한계로 지적된다.

“죽창으로 푹 쑤셔 부니까 말 한마디 못하고 죽어 버렸당깨, 사람 한나가 풀만도 못해, 목심이, 아무리 험한 시상이라도, 징한 놈들, 까시만 찌셔도 아픈디”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백천문(1942년생, 당시 9세)씨의 기억은 아직도 몸서리치게 또렷하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툭 건드리기 때문이다. 접근을 거부하던 ‘우산리 민간인 희생 사건’이 백천문씨의 입을 통해 새롭게 들추어지고 있다.

1950년 9월 28일경부터 전국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민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장흥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민군과 지방 좌익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유치면 보림사 등지로 입산하였고 이후 빨치산이 되어 그 활동을 계속하였다.

장흥의 북쪽에 위치한 유치면, 장평면의 산악지대는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가 되어 이곳에서 빨치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군경과 빨치산과의 교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장흥지역 대부분 읍․면이 1950년 10월 초·중순 사이에 경찰에 의해 치안이 회복된 것에 비해 유치면에서는 10월 중순부터 빨치산 활동이 시작되어 1952년까지 그 활동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빨치산에 의해 장평면, 부산면, 유치면에서 개인 혹은 일가족이 자택 부근에서 희생당하거나 유치면 방면으로 끌려가 희생당하는 사건이 빈번하였다.

장평면 우산리 민간인 학살 현장
장평면 우산리 민간인 학살 현장

950년 11월 어느날 밤, 장평면 우산마을에 내려온 빨치산 2명이 마을주민의 신고로 경찰에게 잡혀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은 보급 투쟁(마을에 내려가 식량과 의복 등을 구하는 활동)을 위해 은밀하게 우산마을에 숨어들어왔는데 명주 바지에 대님을 매고 있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당시 마을 이장이었던 장승길(가명) 등은 빨치산 2명이 마을에 내려왔다는 사실을 지서에 신고한다. 즉각 출동한 경찰에 의해 장동지서로 잡혀간 빨치산은 잠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한 명은 도망가고 한 명은 바로 총살당한다. 빨치산의 움직임을 경찰에 알린 당시 이장이었던 장승길(가명)은 이 사건으로 장동지서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장흥군 유치면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은 장평면 용강리에 소재한 장평면사무소 등지를 습격하기 위하여 장평면으로 내려왔다. 빨치산의 대부분은 장평면사무소 등지를 습격하러 갔고 나머지 빨치산은 장평면 우산리로 향했다.

1950년 11월 20일, 오후 5시경 장평면 우산리에 나타난 빨치산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에 있는 사장나무 앞 공터로 모이도록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자 경찰에 우호적이고 협력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선별해 내는데, 이장 및 그 가족과 일가, 경찰 및 그 가족과 일가 등 열 가족 40여 명이 호명되었다.

호명된 사람들은 빨치산에 의해 농기구와 몽둥이로 구타당하고 죽창에 찔려 희생당하였다. 이러한 학살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이어 빨치산은 마을 방공호로 시신을 옮겨 매장하도록 지시하였고, 시신이 모두 옮겨지자 희생자들의 집에 불을 지른 후 마을을 떠났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희생자는 열 가족 40여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최병두(남, 50), 최병두의 부인 남우순(여, 49), 최병두의 아들 최해진(남, 29), 최병두의 딸 최순례(여, 18), 최하자(여, 11), 장병현(남, 40대), 장영환(남, 30대), 장영환의 동생 장정환(남, 20대), 이영섭(남, 40대), 이영섭의 아들 이기주(남, 20대) 등으로 총 10명이다.

장평면 용강리 민간인 학살 현장
장평면 용강리 민간인 학살 현장

 

사흘 후, 사건 소식을 접한 경찰들이 우산리에 도착한다.

한편, 유치면 대천리에서 처가가 있는 장평면 우산리로 이주하여 살고 있던 백형식(1900년생, 당시 51세)과 이웃에 살던 김만년(1911년생, 당시 40세)은, 사건 후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도척골에 피신해 있었다.

단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웠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사흘 후인 1950년 11월 23일,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결국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너 학살 현장에 갔어, 안 갔어”라고 물으며 우산리 사건 현장에 있었던 마을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아 끌어내었다.

경찰은 색출한 사람들에게 집안을 수색하여 모은 쓸만한 살림들을 지게에 지게 한 후 끌고 갔다. 한참을 걸어 장평면 용강리 장평지소 앞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부리게 한 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을 총살하였다.

당시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백형식, 김만년을 포함하여 김유정(가명), 정정길(가명), 최정식(가명) 등 5명이다. 소식을 들은 유족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김만년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이후 드러난 사실은 김만년의 조카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고 풀어줬는데 풀어 준 것도 잠시, 경찰에 협력자로 활동했던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어디론가 데리고 가서 총살해버렸다. 유족은 희생 장소를 파악하지 못하여 시신을 찾을 수 없었고, 장평면 사기정골에 가묘를 하여 신위만 모셨다고 한다.

한편 경찰은 빨치산과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마을을 불태워버렸고 이때, 마을을 지키던 사장나무 여섯 그루도 함께 사라졌다. 주민들은 별다른 생계대책도 없이 페허가 된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깊은 침묵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학살의 참상을 이야기하는 백천문(1942년생, 당시 9세)씨의 표정과 목소리가 시시각각 변한다. 단지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게 희생당한 아버지(백형식, 1900년생)의 가혹한 죽음이 아직도 원통하고 원통하다.

이미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의 시선은 당시 현장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말하는 ‘과거사’라는 것이 그에게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제공 : 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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