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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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④
  • 장강뉴스
  • 승인 2021.12.1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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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가 지방 좌익에게 학살당한 대덕읍 연평마을 두 가족의 비극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장흥 대덕읍 천관산 아래 연평마을
장흥 대덕읍 천관산 아래 연평마을


독립운동가가 지방 좌익에게 학살당한 대덕읍 연평마을 두 가족의 비극
「그날 초가을 달빛은 한없이 서러웠다.」

지난여름 낯선 사람들의 등장과 함께 마을 사람 몇몇이 변하기 시작했다. 새 세상이 오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온다고 하는데, 그 치들의 행동은 사람만 바뀌었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총으로 무장하고 낯선 군복을 입고 낯선 말투를 쓰는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밥을 해 오라, 고기를 가져오라, 술을 가져오라며 부렸다. 그들이 말하는 혁명과업이란 그럴듯한 말만 없다면 일정 때 왜놈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인민군이 대덕을 점령하기 전 경찰과 면서기들은 주민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들은 텅 비어버린 지서와 면사무소, 해태조합을 먼저 접수하였다. 그리고 장터 신작로 공터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른바 인민재판을 열었다.

재판은 그들이 말하는 죄인들을 여러 사람 앞에 세워놓고 붙잡아 온 그들의 죄상을 하나씩 고하게 한 다음,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 생사를 결정짓는 그런 재판이었다. 대덕 장터에서도 세 사람이 그렇게 죽어 나갔다. 그걸 지켜본 사람들은 낯선 그들이 두렵고 무서워졌다. 언감생심 그들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장흥 대덕읍 연평마을 회관
장흥 대덕읍 연평마을 회관

그들의 위세를 등에 지고 변한 마을 사람들은 그 전에 알던 동네 사람, 고장 사람이 아니었다. 말로는 혁명과업이니 평등 세상 구현이라는데, 그 축에 못 든 대다수 사람들은 살기 위해 그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계급이 생겨 버렸다.

곳간의 양식으로 밥 지어 바치고, 재산 밑천인 외양간 소와 돼지를 잡아 삶아서 그들에게 바쳐야 살 수 있었다. 장에 나온 갯가 사람들에게 그쪽 사정을 물으니, 약산도로 도망간 군인과 경찰을 잡기 위해 수많은 낯선 복장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했다.

갯가 사람들에게는 인민군이 약산도를 침공하기 위하여 어선들을 동원한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낮에는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해안가 산등성이를 따라 호를 파는 부역을 시켰고, 밤으로는 해안가 호에서 야경을 서는 일을 시킨다고 하였다.

난리 통에 힘없는 양민들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들의 위세로 호가호위하며 변해버린 사람들이 더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더 이상 같이 농사짓고 만나면 정답게 인사를 나누던 그런 이웃이 아니었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큰아들이 내려온 때는 낯선 그들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광주에서 출발하여 걸어 걸어서 무척이나 고생하며 고향에 돌아왔다고 했다. 오는 길에 장흥에 사는 동무를 만나 인민재판이 열린 장흥읍사무소에 갔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

고, 그들이 말하는 죄인을 사람들 앞에서 무참히 살해하는 광경을 함께 목도하면서, 동무와 함께 속울음을 울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분기탱천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들을 보며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감정이지만, 이런 혼란한 세상에 자칫 젊은 혈기로 몸을 상하고 일신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아들이 걱정스러웠다.

강씨와 김씨 가족이 집단으로 학살당한 곳 - 연평에서 오산가는 길 소나무 동산
강씨와 김씨 가족이 집단으로 학살당한 곳 - 연평에서 오산가는 길 소나무 동산

고향에 돌아온 아들은, 밤이면 난리 통에 고향으로 피신 내려온 같은 처지의 동무들을 만나러 가곤 하였다. 대덕에는 장흥으로, 광주로, 강진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유학을 떠난 학생들이 꽤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한동안 못 본 동무들을 만나 어울리며 친목을 도모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미국을 주축으로 유엔군이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도우러 온다는 이야기며, 낯선 그들을 등에 업고 변해버린 이웃에 대한 불만을 서로 이야기했던 모양이다.

또한, 인민군이 옹암, 내저에 어선을 집결하여 약산도에 군경을 잡으러 간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던 가 보다. 아들은 동무들에게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제안을 하고, 아들과 동무들은 종이에 일일이 그 내용을 적어 대덕 장날 그것을 뿌리자는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였다.

아들은 주동자로 지목되었고, 함께 하였던 동무들과 보안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장흥읍으로 이송되었는데, 다른 부모들과 소 두 마리를 바치고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난했던 여름을 보내고 추석 명절도 잘 쇠고, 아내와 지난여름 이야기를 나누며 아들이 집에 있음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횃불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당에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 “악질경찰 가족, 지주 강동현(가명)은 인민의 심판을 받아라.” 순식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은 자고 있던 가족들을 마당으로 끌고 나와 동네 회관으로 끌고 갔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연로한 부모님과 동생들 내외, 갓 태어난 어린 조카들까지 끌려와 있었다. 한마을 사는 김종철(가명, 경찰 가족)의 식솔들 얼굴도 보였다.

횃불을 든 무리 중에는 한 마을 종친인 강이규(가명)도 있었다. “어이, 이규 자네가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짐짓 내 시선을 “강동현이는 경찰 가족이고 악덕 지주로 인민을 착취했습니다.”라며 무시해 버렸다. 우리는 한동안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들으며 공포에 떨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기우는 가을 달빛이 한없이 차갑고 서러웠다.

1950년 10월 2일 대덕읍 연평마을에서 지방 좌익이 저질렀던 민간인 학살을 유족과 동네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강동현의 시점으로 각색하였다. 이날 강동현의 가족 16명, 김종철의 가족 8명이 한날한시에 연평에서 오산 가는 길, 소나무 동산에서 총과 죽창으로 무참히 살해되었다.

강씨 가족 희생자 묘소
강씨 가족 희생자 묘소

강동현(1913-1950)은 1934년 독립운동 비밀결사 전남 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2020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동생 강동문(가명)은 1948년 여순사건 때 경찰로 재직 중에 순직하였다.

그날 죄목으로 언급하였던 경찰 가족이란 미명도 이미 순직한 강동문을 이르는 것이다. 큰아들 강지호(가명)는 학생반공삐라살포 사건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건 당일 사랑채에 자고 있던 강동현의 4남매는 화를 면하여 강성호(가명)와 강성희(가명)가 유족으로 증언하여 주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유족은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구평 청다리 선영에 모시고 다른 가족들은 연지 선영에 모셨다. 강성호는 “나는 추석을 맘 편하게 못 쇠네. 닷새 뒤 열여섯 분의 제사를 모셔야 기에…….” 하며 말꼬리를 흐린다. 그 날 아홉 살 소년이 팔순 노인이 되어 눈시울을 붉혔다.

“소원이 하나 있어. 그날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 넋이라도 편히 쉬라고 위령탑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해. 그래야 내가 그분들 만나면 면이라도 서지 않겠는가?” 하며 조심히 속마음을 밝혔다. (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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