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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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③
  • 임순종 기자
  • 승인 2021.12.06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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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들녘 사이에 있는 두 마을 이야기, 학송과 장수 “다르지만 같은 비극”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 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장흥군 안양면 학송마을=사진 마동욱 작가
장흥군 안양면 학송마을=사진 마동욱 작가


한 들녘 사이에 있는 두 마을 이야기, 학송과 장수 “다르지만 같은 비극”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에 있는 학송마을과 장수마을은 한 들녘을 사이에 둔 마을이다.

학송마을은 면사무소가 위치한 운정을 지나 “요곡재(일명 여끗재)” 10리 고개길을 지나면 나타난다.

지금도 눈이 오는 날이면 고개를 넘기가 겁이 나는 오지 길이지만, 고개를 넘어 산마루 정상에 서면 너른 들판이 보이고 화개산 아래 자락에 장흥 馬氏의 집성촌 학송마을이 보인다.

1580년경 충정공(馬天牧)의 6대손인 馬麟瑞(1512~1594)가 이곳 화개산 아래 해발 70~80m 자락에 입촌 후 마을을 조성하였다. 이때부터 주변 소나무에 학(鶴)이 서식하여 학송(鶴松)이라 불리었다. 한때는 100여 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20여 가구에 70~80대 어르신들이 거주하고 있다.

장흥군 안양면 학송마을 최영순할머니(가명, 90세)=사진 마동욱 작가
장흥군 안양면 학송마을 최영순할머니(가명, 90세)=사진 마동욱 작가

 

학송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은 문대구(가명, 1925년생) 어르신을 찾아갔다.

“우리 마을은 그랴도 다친 사람들이 별루 없었어. 저기 장수마을에 다친 사람들이 많았제. 우리 마을은 마동명(가명, 1926년생) 그 사람만 상했지...참 좋은 사람인디 억지 죽음 당했제” 혀를 끌끌 차시며 고개를 젓는다.

학송마을에서 한국전쟁통에 희생된 유일한 희생자 마동명. 문 씨 어르신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야무지고 똑똑해서 동네 청년들 훈련대장도 했는데 ‘하필이면 좌익 머리를 써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그해 8월에서 9월 27일경까지 전남 장흥은 인민군 세상이었다. 그러다 인민군이 퇴각하고 나서 좌익활동을 하던 이들은 모두 산으로 숨어다녔다.

아마 다시 세상이 바뀔 것이라 믿었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 빨치산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 다니던 마동명 씨는 자수하려고 마을로 내려왔다. 당시 장흥읍 읍장을 하던 친척의 집으로 찾아갔다.

같은 일가였던 친척은 마동명 씨를 반갑게 맞이하며 내일 아침에 날 밝으면 집 앞에 있는 군청에 같이 가서 자수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갑자기 그 집에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잡혀 장흥경찰서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산으로 가서 빨치산들의 정보를 캐내는 정보원이 되라는 강요를 받았고, 그 뒤에 유치 가지산에 숨어있던 빨치산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 뒤에는 소식이 끊겨 그 산 어디선가에서 죽었을 거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장흥군 안양면 학송마을 문대구(가명, 94세) 어르신=사진 마동욱 작가
장흥군 안양면 학송마을 문대구(가명, 94세) 어르신=사진 마동욱 작가

학송마을에는 마동명 씨를 기억하는 가족이 아직도 살고 있다. 마을 맨 위쪽 집에 혼자 사시는 구순의 최영순(가명, 1930년생) 할머니가 마동명 씨의 제수이다. 최영순 할머니는 20살에 시집와서 마동명 씨가 남기고 간 딸을 자신의 7남매과 함께 키워내셨다.

“20살에 시집와보니 시어머니가 장남 밥상을 매번 차리고 있더라고. 먹을 것도 없는디 매 끼니마다 그걸 차리더마. 어디 가서도 밥이라도 곯지말라고 그란거지. 66년인가 그때 가서야 사망신고를 했제. 아들도 없이 네 살짜리 딸만 하나 남기고 가버려서 시집오자마자 나가 그 딸을 키웠제. 지 어미도 재가를 하고”

4남매 중 장남이었던 시아주버니 마동명 씨의 밥상을 매 끼니마다 차리던 시어머니는 어느 날 마을 서당에 다녀온 둘째 아들을 세워놓고 회초리를 들었다.

까막눈이라도 면하고 싶어서 마을 서당에 다녀온 둘째 아들은 서럽게 울었지만 소용없었다. 종아리에 피가 나게 때리면서 시어머니가 한 이야기가 최영순 할머니에게는 지금도 생생하다.

“글 배워서 뭐할라고, 뭐 될라고 하냐!”

빨갱이 가족이라 어디 가서 아들 찾아달라고 말도 못 하던 시절, 그저 어디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만 있어서 배나 곯지 말라고 빌고 또 빌던 어머니는 잘난 아들에게 글을 가르친 것을 얼마나 후회했을까.

글 배우겠다는 작은아들의 종아리가 피가 터지게 때리고 나서 그날 밤 그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을 치며 울었을까. 세월은 무심히 흘러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그 가족의 가슴 아픈 삶을 기억하는 이들도 구순의 할머니뿐이다.

장흥군 안양면 장수마을 빨치산들이 상주했던 이숭골과 장수마을=사진 마동욱 작가
장흥군 안양면 장수마을 빨치산들이 상주했던 이숭골과 장수마을=사진 마동욱 작가

학송마을 지나 큰길과 들을 지나면 장수마을이다. 삼비산과 천지 저수지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장수마을에서는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에 많은 이들이 죽거나 사라졌다. 학송마을 문대구 어르신의 이야기대로 “좌익바람이 세게 불어서”였을까. 그 시절에 죽은 사람들 중에 마진기씨(가명, 1924년생)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마진기 씨의 아들 마동선 씨(가명, 1948년생)가 아직 그 마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들 마동선 씨는 아버지의 일을 거의 알지 못한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그저 쉬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빨갱이 자식으로 살아온 세월 곳곳에는 서러움에 걸려 넘어진 흔적이 가득하다. 아버지 이야기에 “난 잘 모르제”하는 얼굴에 상념이 가득하다.

1951년 당시 8살이었던 마진기 씨 이웃집에 살았던 김문선 씨(가명, 1944년생)는 동선이 아버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동선 씨의 아버지 마진기 씨는 인공 때 좌익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고 경찰이 주둔하자 산으로 도망갔었다.

유치에 있는 가지산으로 밀렸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고, 토벌대에 마진기 씨를 아는 경찰이 있어서 집으로 연락을 줘서 마진기 씨의 어머니가 집에서 일하던 이와 함께 가서 시신을 수습했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장흥군 안양면 장수마을 마진기(가명, 1924년생)씨 결혼사진=사진 마동욱 작가
장흥군 안양면 장수마을 마진기(가명, 1924년생)씨 결혼사진=사진 마동욱 작가

마동선 씨의 작은어머니 임숙자 할머니(가명, 1941년생)도 “그 집이 안됐제라”라며 고개를 저었다. “25살에 여그로 시집와보니 시댁 시아주버니가 좌익이었는데 유치 가지산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고 하더라고.

울 시어머니가 직접 가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뤘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라. 거그 시아주버니 동생도 형이 그렇게 되고 나서 산사람들 따라가서 행방불명되고. 나 시집오고 그 행방불명된 시동생 사혼식 올릴 때 내가 거들었제.

그때는 마음이 영 거시기하더랑께. 그렇게 형제가 죽어부러서 그 집 식구들이랑 자석들이 고생 많이 하면서 살았제”

아버지 이야기에 고개부터 젓던 마동선 씨는 처음에는 하나도 없다던 아버지 사진을 찾았다며
연락이 왔다. 가서 보니 마진기 씨의 결혼식 사진과 안양면 청년대 기념사진(소화 19년, 1944년)이었다.

안경을 쓴 순한 얼굴의 청년은 일제가 1944년 노동력 동원을 위해 조직한 조선농업 보국청년대의 일원으로 안양면 청년들과 함께 동원되기도 했다.

그 사진을 찍고 그다음 해 1945년 8월 일제가 항복하고 해방이 찾아왔을 때 이 순한 얼굴의 청년은 얼마나 기뻤을까. 해방된 조국에서 장가도 가고 아이를 낳으면서 희망에 부풀었을 청춘은 그 아들딸에게 아버지 노릇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가지산 골짜기에서 숨을 거뒀다.

마진기 씨의 아들은 모진 세월의 풍파를 거쳐 지금은 마진기 씨와 그의 동지들이 숨어있었던 이숭굴(이숭골) 깊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다.

장흥군 안양면 청년대 기념사진, 소화 19년(1994년)=사진 마동욱 작가
장흥군 안양면 청년대 기념사진, 소화 19년(1994년)=사진 마동욱 작가

장수마을에서는 마진기 씨 말고도 한국전쟁 전후에 많은 희생자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기억이 안 난다던 어르신들이 만날 때마다 잊혀진 이름을 하나씩 꺼내어 이야기한다.

우리는 아직 발굴되지 못한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 지금껏 외면하거나 묻혀있던 이야기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근원적 기반이 어디에서부터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또한, 한 들녘을 마주한 마을이 이렇듯 상황이 다르게 전개된 것을 보면서 마을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마을의 이야기로부터 역사를 알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람이 많이 떠난 마을의 이야기에 주목할 이유가 다시금 새삼스럽다. (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청년대는 일제가 1944년 태평양 전쟁 준비를 위한 노동력을 동원하는 정책으로 전국적으로 조직한 조선농업보국청년대의 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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