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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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1
  • 장강뉴스
  • 승인 2021.11.1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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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유치면 용문 당산마을 밀양박씨 경찰가족의 비극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 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한국전쟁 전후로 가족을 잃은 박기종씨가 1948년 당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빨치산에게 학살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은행나무 아래쪽에 집이 있었다.
한국전쟁 전후로 가족을 잃은 박기종씨가 1948년 당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빨치산에게 학살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은행나무 아래쪽에 집이 있었다.

한국전쟁 전후 유치면 용문 당산마을 밀양박씨 경찰가족의 비극

보림사 창건 설화와 인연이 깊은 용문(龍門 장흥군 유치면에 있었던 용문, 당산, 노루목마을)은 보림사 들어가는 삼거리에 있었다.

보림사 창건 때 백룡이 쫓겨가다 꼬리를 쳐 바위가 문같이 되자 용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용문은 장흥댐으로 뭉개지고 수몰되었다. 

그 가운데 25 가구 정도가 살았던 당산마을은 물속에 잠기지는 않았지만, 이미 한국전쟁 포화 속에서 폐촌이 되었다.

당산마을이 있었던 오솔길로 들어가니 가시덤불 속에 여기저기 돌담들이 얼굴을 내밀며 이곳이 집터라고 알려준다.

박씨 가족의 집터 뒤편, 그때도 서 있었다는 키 큰 은행나무는 한국전쟁의 상흔을 기억하고 있을까. 

한국전쟁 전후로 큰할아버지 한집안 가족(5명)과 할아버지, 큰아버지가 비명에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는 박기종(가명, 1951년생)씨의 이마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1948년 당시 큰아버지 박기수(가명, 1927년생)씨는 경찰(또는 해군)이었다. 

1948년에는 남한단독선거를 두고 온 나라가 찬성과 반대로 갈리어 치명적인 충돌 상태였다.

그 당시 장흥의 좌익세력은 유치면의 가지산과 국사봉이 있는 첩첩산중에 숨어들어 가까운 산속마을을 이른바 해방구로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박씨 가족이 살고 있던 당산마을은 경찰의 치안과 빨치산의 영향력이 팽팽한 기세로 맞섰던 경계에 있었다.

당산마을은 유치지서가 있는 면소재지와 이른바 빨치산 주력부대가 집결한 가지산자락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박기종씨가 가져온 제적등본을 보니 할아버지 박우종(가명, 1897년생)씨와 큰아버지 박기수씨의 사망 장소와 일자가 동일했다.

장흥군 유치면 용문리 44번지, 1948년 3월 20일(양력 4월 28일) 오후 6시. 박기종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경찰이던 큰아버지가 집에 들렀고, 이를 알아차린 빨치산들이 집을 습격하여 대창으로 박우종씨와 박기수씨 부자(父子)를 찔러 죽였다.

이때 아버지 박병수(가명, 1928년생)씨는 뒷문으로 도망가 죽음을 면했다. 마을에서 치상을 치르고 피재 올라가는 마을 건너편 산자락에 묘소를 썼다.

그 뒤로 할머니 이달자(가명, 1910년생)씨는 밭에서 일하다 빨치산들에게 끌려가 행방불명되었다.

1950년 한 마을에 살았던 큰할아버지 일가의 죽음은 훨씬 처참했다. 큰할아버지 박종태(가명, 1895년생), 큰할머니 김봉자(가명, 1896년생). 그들의 자식들은 어렸다.

딸 박태자(가명, 1939년생), 아들 박상수(가명, 1941년생)와 박상구(가명, 1948년생). 큰할머니 김봉자씨는 박기종씨와 재혼했는데, 딸이 하나 있었다. 당시 그 딸의 남편이 경찰이었다. 

재적등본에 기록된 이 다섯 식구의 사망 장소와 일자도 동일했다.

1950년 10월 16일(양력 11월 25일),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동산부락) 후등(後嶝). 후등이라 표기된 장소는 마을사람들이 죽동이라 부르는 곳으로 당시 빨치산 부대가 있던 아지트였다.

죽동은 용문 당산마을에서 보림사 지나 십리 정도 거리에 있는 깊은 산속이다.

박기종씨 일가를 죽동으로 끌고 간 빨치산들이 반동이란 명목으로 아직 갓난아기까지 죽인 것이다.

1950년 당시 당산마을에 살았던 강시우(가명, 93세, 현재 장흥읍 거주)씨는 박종태씨 일가를 살리려고 죽동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물론 빨치산 아지트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기에 평소 친분이 있던 장흥군당위원장의 허가가 있었다. 강시우씨가 죽동에 올라갔을 때는 이미 일가족이 죽어 너부러져 있었다. 

강시우씨는 너무도 끔찍한 회한이 드는지 이야기를 하는 중에 자주 이마를 찡그렸다.

다 같은 마을사람들이었는데 한쪽에서는 반동이라고, 또 한쪽에서는 빨갱이라고 서로 죽였다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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