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추억을 간직한 체 홀로 사시는 장흥 유치면 할머니 집 ‘계단 공사’ 마무리
비만 오면 전기나가 ‘냉장고 식자재 못 쓰게 돼’ 유치면장 도와줘 ‘전기 공사’
봉미녀, 공단에 10번가서 할머니 불편한 다리 호소 ‘장애인 침대’ 지원받아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맞추어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지난 9월은 장흥 유치면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 집을 방문했다.
출발하기 전에 아침 일기예보에 비가 조금 올 것이라고 했지만, 할머님이 다리가 너무 불편해 계단을 앉아서 내려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정대로 공사를 시작했다.
한 시간 남짓 공사를 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억수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깔깔깔” 봉미녀(봉사에 미친 여자)는 비 오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공사를 진행하는 봉미남(봉사에 미친 남자)을 위해 우산을 받쳐 주면서 배꼽이 빠지라고 웃는다.
“기계에 물들어 가면 안 되잖아” 나는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이리저리 덮을 것을 찾으러 다니면서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봉미녀 눈에는 웃겨 보였는지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나중에 물어보니 우산도 안 쓰고 비에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물에 빠진 생쥐의 모습 같아서 웃었다 한다.
공사 기계랑 용접기 전기 연결선을 비를 맞으면 안 되니, 덮을 비닐을 찾기 위해서 할머니 집 안을 들어가 보았다. 할머님은 작은 방에 아파서 누워 있었다.
그런데 부엌이 냉장고가 열려 있고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는데 황급히 바닥에 있는 비닐 몇 장을 급하니 들고 나가 무사히 기계랑 장비를 잘 덮어 놓았다.
다행히 비는 곧 그쳤고 공사는 강행되었다.
바닥이 흙이 아니라 시멘트라 어려워 보였는데, 봉미남이 묵묵히 잘 진행하고 있는걸 보고 나는 다시 할머니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할머니 바닥에 이 물은 왜 이런 거예요?” 궁금해서 물었더니.힘없는 목소리로 “몇 년 전부터 비만 오면 전기가 나가 버려” 며칠 계속 비가 와 전기가 나갔다 한다.
냉장고 있는 식자재들이 녹아 그러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본 생활을 할 수가 없는데 정말 큰 일이네”….
2004년 제15호 메기 태풍 때 전남은 물바다가 되어서 쑥대밭이 되었다.
그때 할머니 다리가 부러졌다고 한다. 자세한 사연은 봉미녀를 통해서 들을 수가 있었다.
봉미녀 이웃인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 한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은 낡은 작은 초가집을 태풍에 떠내려가지 않게 하려고 집에서 나오지 않고 두 분이 서서 몸으로 벽을 지탱했다고 한다.
나는 봉미녀에게 다시 물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랬더니, 봉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벽에 몸을 붙이고 두 팔을 벌리면서 몸으로 설명을 했다.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태풍이 오던 날, 마을 사람들은 다 피신을 했는데 이 부부는 집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담보로 하고 그 집을 지키려 했던 곳이다.
비는 계속 왔고 방안에 물이 많이 차면서 바깥에서 큰일 난다며 부르니 그때야 황급히 빠져나오다가 할머니가 넘어져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다행히 포크레인에 실려 구출되었지만 곧 순식간에 집은 흔적도 없이 무너져 쓸려 내려 가버렸다.
몇 초만 더 지체했다면 집과 함께 무사하지 않았을 거라 말하며 봉미녀는 그 날 있었던 생생한 장면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태풍 피해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라에서 반을 부담하면 집을 지어 준다고 했지만, 이 노부부의 재산이라고는 조그마한 논이 전부인데, 우선 당장은 돈은 없고 집이 필요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논을 팔고 빚도 좀 내고 해서 어렵게 1500만 원을 마련해 집을 짓게 되었다.
다리가 온전하지 않아 일 할 형편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땅 한 평 없게 된 할머니는 그때부터 남의 집 밭일을 하러 다녔다.
시골에서 봉고차라고 부르는 차가 있다.
마을 사람들을 태우고 밭에 일하러 가는 차를 일명 ‘봉고차’라고 부른다.
불편한 한쪽 다리를 끌고 일하러 갔다 오면서도 술을 좋아하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꼭 막걸리 한 병을 사 왔다고 한다.
동네에서 제일 가난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님이 금술이 제일 좋았다.
허리를 다쳐 불편한 할아버지와 할머님이 가난하고 팍팍한 삶을 살았지만, 우리 세대 부모님들이 그러하듯 자식에게 헌신적인 사랑으로 먹을 거 안 먹고 자식 가리켜 공부시킨다고 어렵게 사셨다.
할아버지가 남의 집 뒷간을 똥지게로 똥을 퍼주고 남의 집에 가서 소를 키워 주고 그 대가로 송아지를 받아와 소를 키워 돈을 조금씩 모아 자녀를 서울 명문대를 보냈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출가한 아들 집도 며느리가 오랜 암 투병으로 몹시 어려우니 여유가 없는 듯하다.현재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할머님 혼자 사신다.
연세가 많은데 이 계단을 다리가 아파 엉덩이로 앉아 내려왔는데 이제는 이렇게 난간을 잡고 내려 올 수 있도록 공사를 잘 해서 할머님이 서서 내려오시니 참 다행이다.
9월 한 달은 참 바빴다.
할머님을 돕기 위해서 장애인 침대를 보조받을 수 있도록 봉미녀가 공단에 10번이나 가서 하소연하며 신청해 결국 지원받게 되었다.
유치면장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전기 공사까지 하게 되어 앞으로는 비가와도 전기가 나가지 않게 되어 정말 보람 있는 한 달이 되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주었던 한없는 사랑을 또 올리면 이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