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불효(不孝)보다 더 큰 죄(罪)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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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칼럼 - 불효(不孝)보다 더 큰 죄(罪)는 없다
  • 장강뉴스
  • 승인 2021.04.26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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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중 논설위원

효(孝)는 덕(德)의 근본이다. 효라 함은 어버이를 극진히 섬기고 받드는데서부터 시작하여 스스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나아가 크게 출세하여 가문과 어버이의 명예를 크게 나타내는데 있는 것이다.

최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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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란 옛날 성인들이 이 백성들을 교화하던 가장 극진한 덕이요, 또한 밝은 도(道)인 것이다.

자녀가 스스로 자신은 자기 개인의 몸이 아니요, 근본으로 부모로부터 받은 분신(分身)이니 평생을 소중하게 이 육신을 보호 관리하여 그가 일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알뜰히 보호해야만 한다.

효자가 그 부모를 섬기는 효심을 나라에 적용시키면 충성이 되고 친우에게 이어지면 믿음이 될 것이니 이러한 행실을 갖춘 사람은 스스로 위대한 업적을 쌓아 장차 입신출세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불효(不孝)란 효도를 안하는 것이다. 불효의 삼대(三大) 죄목(罪目)은 수상 어른에게 반항하면 인사불성이 되고 상대를 멋대로 비방하면 무법천지가 되고 효도를 부정하면 부모님을 불고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불충죄가 되고 불효죄는 대란역도죄가 된다.

옛날의 형벌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효경에 실려있는 다섯 가지 형벌만 보더라도 그렇다.

몸에 글씨를 새기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 발을 베는 비형(비형),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宮刑), 사형에 해당하는 대벽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엄격한 형벌로 다스려도 범죄는 끊이질 않았다.

근본적으로 살기가 어렵고 형벌에 대한 경각심과 사회적 윤리도덕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과 배려 즉 인(仁)을 통치원리로 삼는 유가에서도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공자는 논어 ‘위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을 법령으로 이끌고 형벌로서 다스리면 백성들은 형벌을 면하려 할뿐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러나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잘못을 바로잡게 된다.

백성을 덕과 예로써 이끌 때 그들이 진정한 도리를 알게 되고 스스로 자신을 가다듬고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형벌이 필요없다. 물론 공자의 말은 지극히 옳지만 이상에 치우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수많은 형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이 엄격하고 잔인한 형벌은 백성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만약 죄를 짓게 되면 빠져나갈 길이 없고 그 댓가도 참혹하므로 스스로 자신을 가다듬어 죄를 짓지 말라는 예방적 경고인 것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형벌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공정과 정의(正義)라고 했다. 지나치게 엄격해서도 안되지만 무조건 온유하게 다스리는 것도 마땅치 않다고 보았다.

범죄의 예방이 되지 않을뿐더러 재범을 막는데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산이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쓴 ‘흠흠신서’의 취지도 그랬다. 엄격하지만 온유하고 정의로우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국법의 기준을 제시하려 했다.

또한 형벌의 취지는 단순히 죄를 벌하는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을 바르게 이끌어 교화하는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형벌의 의의가 그 사람이 미워서 그를 아프고 괴롭게만 하려는데 있는 것인가? 그를 아프고 괴롭게 함으로서 허물을 고치고 착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듣기로 성인(聖人)이 형벌에 대해 조심하고 조심하여 백성들을 돌보는 방향으로 형을 집행하라고 하였지 되도록 놓아주지 말라고 한 말은 못들었다.

무조건 엄중한 처벌이나 관용이 아닌 엄격하지만 인간성을 존중하는 형벌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형벌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할 죄도 있다. 효경에는 다섯 가지 형벌의 종류가 삼천가지나 되지만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다. (五刑之屬三千而罪莫大於不孝(오형지속삼천이죄막대어불효)라고 실려 있다.

그 어떤 죄보다 불효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죄라는 것이다.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도리가 효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는 그 어떠한 잔혹한 범죄자보다 죄가 크다는 것이다. 다산은 ‘소학지언’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서경 강고(康誥)에선 형벌을 경계하면서 부모에게 불효한 것과 형제간에 우애가 없는 것을 가장 크고 나쁜 일로 보았다.

불효자와 우애가 없는 자에게 경계하기를 법에 따라 처리하고 용서하지 말라고 하였다. 오늘날 불효에 대한 형벌은 폐지됐고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

백성들이 한 마디라도 심기를 거슬리면 모두 불충(不忠)의 죄목으로 처벌하지만 불충한 자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만약 불효의 형벌을 다시 밝혀 근본을 닦는다면 불충한 자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다산은 모든 죄의 근원은 바로 효도를 하지 않는 불효에 있다고 보았다. 효의 도리가 온 나라에 바로서면 모든 죄악이 근절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오늘날 부모에 대한 불효는 범의 관점보다 인륜(人倫)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어지간한 폐륜이 아닌 다음에는 형벌에 적용되는 경우도 드물다.

물론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법보다 인륜이 더 무겁고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법은 죄를 벌하는 것이지만 인륜은 사람답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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