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장흥고싸움줄당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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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장흥고싸움줄당기기
  • 임순종 기자
  • 승인 2020.09.07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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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탐진강변에 형형색색 ‘150년 전통 장흥고싸움’ 벽화 눈길
단순히 민속놀이가 아닌 민중들의 한을 표출하는 작은 몸부림
장흥고싸움줄당기기
장흥고싸움줄당기기

장흥군을 가로지르는 탐진강변에 형형색색의 ‘장흥고싸움줄당기기’ 벽화가 그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탐진강 서편에 그려진 이 그림은 150년 전통의 장흥고싸움줄당기기를 묘사했다.

장흥고싸움줄당기기는 1872년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로 시작됐으나, 일제 강점기에 중단됐다가 1970년 ‘제1회 장흥 보림문화제’를 계기로 부활했다.

장흥고싸음줄당기기 장흥 탐진강변에 벽화로 재탄생
장흥고싸음줄당기기 장흥 탐진강변에 벽화로 재탄생

정월 대보름 날 장흥군 탐진강변에서 고싸움 및 줄당기기 시연의 전통이 있었다.

고싸움은 줄패장이 “밀어라” 소리치면 멜꾼들은 함성을 지르며 상대의 고와 정면으로 부딪힌다.

이렇게 몇 번이고 맞부딪히면서 상대편의 고를 어떻게 하든지 땅에 닿게 하면 이기게 된다.

장흥군은 탐진강 동편에 전통방식으로 제작된 실제 고를 전시하고 있다.

장흥고싸움줄당긱 장흥 탐진강변에 벽화를 재탄생
장흥고싸움줄당긱 장흥 탐진강변에 벽화를 재탄생

정종순 장흥군수는 “장흥고싸움의 위용은 장흥의 역동적이고 희망찬 미래를 상징한다”며, “하나로 힘을 모아야 이길 수 있는 고싸움처럼 코로나 위기를 국민 모두 지혜를 모아 극복해 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장흥고싸움줄당기기 역사

장흥의 ‘고싸움’과 ‘줄다리기’는 ‘고쌈’이라는 약칭으로 많이 부른다. 다른 이름으로는 ‘고줄쌈’이라고도 부른다.

1970년 탐진강에서 장흥고싸움줄당기기 행사
1970년 탐진강에서 장흥고싸움줄당기기 행사

규모가 작은 것은 ‘줄당기기’, ‘줄땡기기’, ‘줄쌈’ 등으로 불렸다. 그러다 1970년 이후 ‘장흥보름줄다리기’라는 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장흥지역 어른들의 구술에 의하면 1970년 4월 15일 예양강변에서 열린 ‘제1회 보림문화제’에서 ‘고싸움’이 재현된 후, 그해 7월 광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전라남도 대표로 참가하면서 ‘보름줄다리기’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

장흥고싸움
장흥고싸움

하지만 장흥 ‘고쌈’은 보름에만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름줄다리기’라는 명칭이 적합한 용어라고 보기 어렵다 생각해 타 지역 고싸움놀이와 차별화 될 수 있고 장흥 지역민들이 보림문화제에서 ‘고싸움’이라는 용어를 오래도록 사용해왔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장흥고싸움줄당기기’라는 명칭이 탄생했다.

■조선시대에 행해진 ‘장흥고싸움줄당기기’

조선시대 장흥에는 특별하게 한 지역에 두 개소의 관아와 관리관이 있었다.

장흥도호부를 관장하는 도호부사의 동헌과 관아는 부내방, 부동방에는 벽사찰방의 동헌과 관아가 있었다.

1970년대 장흥고싸움
1970년대 장흥고싸움

장흥읍에서 남북으로 관통하여 흐르는 예양강(탐진강)을 중심으로 장흥도호부사 관하의 부동방(부동면)이 동부, 부내방(부내면)이 서부가 되었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장흥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도호부와 벽사역의 힘겨루기로 진행됐다.

이러한 관습은 최근까지도 경기를 진행하기 전 군수와 서장 등 관리를 고에 태워 행군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흥고싸움줄당기기는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음력 2월 1일에 매년 주민들이 예양강(탐진강) 백사장에서 경기를 했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1931년 3월 2일 ‘매일신보’에 ‘장흥고싸움줄당기기’ 기사가 게재됐다.

「전남 장흥서는 구정월 십오일을 이용하여 장흥교 아래 넓은 백사장에서 홍기 백기로 편을 갈라 색전대회를 개최하였다. 넓고 긴 장흥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이 용맹스러운 양군은 큰 북소리의 응원 아래 위엇차 소리는 관람객의 가슴을 속긋하게 한 이때에 좋고 맵시 있는 아름다운 기생의 춤은 금상첨화가 되었다. 실로 이네들의 향락은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였다. 양군의 승부는 결단치 못하고 그 날 오후에는 부슬부슬 떨어진 빗방울은 관람객의 가슴을 상하여 주고 말았다.」

장흥고싸움
장흥고싸움

그렇게 활발하고 씩씩하던 고싸움줄당기기가 점차 약화되고 1940년대 이후에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 이유는 일제의 식민정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줄다리기, 돌팔매, 불싸움 등의 집단 전통놀이는 통제와 금지를 반복하면서 점차 약화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를 검토해 보면 통제와 억압 속에서도 주민들의 줄다리기에 대한 욕구는 강하게 작용하여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줄다리기가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1906년~1940년 장흥고싸움줄당기기 정황

1932년 11월은 부동면과 장흥면이 통합된 해이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듬해 정월 보름 혹은 이월 하드렛날 고싸움줄당기기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1990년대 장흥고싸움
1990년대 장흥고싸움

1933년 7월부터는 탐진강 내에 있는 장흥시장을 천변으로 옮기는 매축작업을 했다.

매축작업을 한 후 땅을 다지기 위해 이듬해인 1934년 고싸움줄당기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1936년에는 집중호우로 탐진강이 범람하여 매축했던 5일시장을 복구하고, 장흥면사무소를 확장하여 기양리로 옮겨갔다.

1936년 이른바 병자년 홍수로 유실된 한들(평화들)의 제방을 완공되어 주민들로 하여금 경사스러움을 표하게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방 완공과 시장 복구를 기념하기 위해 이듬해인 1937년 고싸움줄당기기를 했을 것이다.

2011년 장흥고싸움
2011년 장흥고싸움

특히, 1940년 11월 장흥이 읍으로 승격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탐진강변이 아닌 석대들에서 그해 아니면 그 이듬해인 1941년 정월 보름에 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장흥교 아래 탐진강변이 아닌 석대들이었다는 점이다.

석대들은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와 마지막 격전을 벌인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격전지로 장흥군민의 저항의지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장흥지역 어른신들의 구술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장흥고싸움줄당기기는 단순히 민속놀이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 일때도 ‘장흥고싸움줄당기기는 명맥을 유지했다.

이는 민초들의 피팍한 삶을 달래주고, 불평등 세상에 대한 고통과 울분의 한을 표출하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47회 장흥군민의날 '장흥고싸움'
47회 장흥군민의날 '장흥고싸움'

장흥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지역을 대표하는 전승문화재이며, 역사적·학술적·사회문화적 가치를 체현한 문화유산이다.

오랜된 역사적 내력을 지니고 있고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전승문화재로서의 남다른 가치와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흥고싸움줄당기기를 보존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단계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지역민들이 지역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알고, 자긍심과 애향심을 갖는다면 문림의향 장흥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발취:장흥고싸움줄당기기(저자 이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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