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주인공 27 - 노모를 모시며 효(孝)를 실천한 위만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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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주인공 27 - 노모를 모시며 효(孝)를 실천한 위만환 씨.
  • 조창구 기자
  • 승인 2019.08.09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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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환씨 ‘치매 앓으신 어머니 모시고 묵묵히 자식 도리 실천’

위만환 씨 “어머님께서 편히 살다 가시면 그걸로 충분” 심정 고백

▲ 위만환씨가 어머니에게죽을 드리고 있다.

요즘은 고령화시대라고 한다. 시골마을에는 자식들은 객지로 보내고 홀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강진군 군동면 평덕마을에서 홀로 계신 어머님을 모시며 자식의 도리를 실천하고 있는 위만환(59)씨를 만났다.

위만환 씨는 집에 홀로 계실 어머님 걱정에 30대 초반에 교육청에 근무하는 여동생이 광주로 발령받자 대신 광주에서의 생활을 접고 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다. 벌써 30년이 됐다.

위 씨의 어머니는 송기순씨로 1923년생 올해 97세다. 군동면 동동마을에서 시집와 위 씨가 열다섯 살이던 오십대 초반에 홀로 돼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4남 2녀의 자식들을 키워냈다. 위 씨는 막내아들이며 밑에 1명의 여동생이 있다.

강건하셨던 위 씨의 어머님은 10년전부터 치매라는 병을 앓고 계신다.

어머님께서 병원에서 처방해준 치매 예방약을 드셨지만 서서히 시작된 치매는 8년전부터 심해져. 6~7년전부터 치매로 자식들도 잘 못알아보실 정도가 됐다. 5년전부터 대소변이며 병수발을 해야 했다. 사람을 몰라보는데다 말도 못하는 지경이 되셨다.

집에서 모시기 힘들어 3~4년전 요양병원에 입원시킨 적이 있는데 기억력이 나빠져 사람을 몰라보는 와중에도 집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신지 ‘집에 가자’고 난리쳐 밤중에 태워서 집으로 모셔왔다. 

어머니의 치매가 심할 때는 조그만 소리에도 바로 뛰어와 살피는 등 긴장의 연속이었다. 물건을 파손하거나 넘어져 다치는 일이 많다 보니 파손이나 부상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방 문 손잡이도 없애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간혹 가스불을 켜놓기도 해 밖에 일 보려면 아예 밸브를 잠그고 나가야 했다.

어머님이 2년전부터는 기력이 급격히 쇠약해져 누워 지내며 수발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됐다. 

이렇게 위만환씨가 직접 어머니 수발을 하게 된 데는 마을에서 어머님보다 더 젊으신 분이 요양원에 들어갔는데 치매있다고 묶어놔 6개월도 못살고 돌아가시는 것 보고 차마 어머님을 못보내겠더라고 한다.

위만환씨는 매일 아침 5시경 이면 일어나 오전 6시와 낮 12시 저녁 6시에 규칙적으로 어머님께 식사를 대접한다. 시골사람이다 보니 옛날부터 버릇돼 일찍 일어난다고.

마침 저녁 6시가 돼 아들인 위씨가 어머님에게 죽을 준비해 식사 하시는 모습을 보니 치아가 몇 개 남지 않은 상태임에도 ‘쩝쩝’ 소리가 날 정도로 맛있게 드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들의 정성스런 마음이 어머님에게 전달돼서 일까? 

대화가 안되다 보니 위씨는 어머님의 표정과 입을 보고 배고프신 걸 알고 식사나 간식을 대접해드린다고 한다.

▲ 위만환씨가 빨래를 걷고 있다.

직접 보살피는 데 신경쓰다보면 생활이 힘들텐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 물었다.

위씨는 “저 혼자 어머님을 모신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며 제가 모아둔 돈과 나머지는 수원과 광주 등지에 사는 형님, 누님, 동생들이 한마음으로 도와주고 챙겨줘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위씨는 건설회사 관리부장으로 10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고  현재는 다른 건설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건설회사 직원으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지만 애로사항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위씨가 처음부터 어머님을 모시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처음엔 5년 정도만 있다 도시로 올라간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렇게 됐다. 제일 위 형님이 고향근처로 발령을 기대했는데 경기도로 발령나 이사가는 바람에  계속 눌러앉게 됐다.     

위씨는 “아픈 사람 특히 치매는 누군가 옆에서 보살펴줄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지금이야 양로원과 요양원이 많이 생겨 활성화됐지만 어머님이 아프기 시작하던 그때는 요양원이 있어도 국가보조가 없어 비쌌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치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행정기관에서의 도움도 늘어나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도와주고 있고 물티슈며 기저귀 지원 등도 받고 있다.

어머님께서 거동을 못한 후로는 옆에서 식사준비며 집안청소, 설거지, 빨래는 물론 기저귀 교환과 목욕도 주기적으로 해드리고 있다. 특히 욕창 방지를 위해서 애쓰고 있다. 겨울에는 2시간 정도에 한번씩 옮겨드리지만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30분~1시간 간격으로 몸을 움직여드려야 한다. 욕창은 옆에서 도와주는 위씨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다. 때문에 밖에 나가 하루를 외박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아픈 어머님을 모시는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는 위만환씨. 위씨는 “동네 어르신들이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남에게 권할 사항은 아닌 것 같다. 저도 혼자 살고 있어 모시고 있지 가정을 갖고 있다면 힘들었을 것”이라며 “어머님이 옆에 계신 것 만으로도 좋다. 어머님께서 편히 살다 가시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또한 “주변에서는 효자라는데 부모님이니 외면할 수 없어 모시는 것이지 효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여건이 안돼서 못하지...”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위만환씨의 어머니 송기순씨는 동네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농사짓고 고생하시면서도 평생 욕안먹고 사셨다고.  지금 아들의 병수발도 어렸을 적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셨던 어머님에 대한 기억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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