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姓)씨 알아보기 4 - 천녕 견씨~태인·해주 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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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姓)씨 알아보기 4 - 천녕 견씨~태인·해주 경씨
  • 장강뉴스
  • 승인 2018.11.1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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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중(한국성씨본존회 위원)

〈11〉川寧 堅氏(천녕견씨)

▲始祖 堅權(시조 견권)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토벌할 때 무공을 세워 개국이등공신에 책록된 견권을 시조로 하는 우리나라 벽성씨이다. 본관으로 하는 천녕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지방으로 원래 고구려의 술천현이었으며 주요 성씨로는 견(堅), 이(李), 유(兪), 장(張), 현(玄), 최(崔) 등이 세거하였다.

견씨는 천녕 이외에도 사량, 수원, 김포, 충주 등 4본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견권은 왕건이 후백제를 토벌할 때 좌익장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대상까지 오른 인물이다.

▲1960년 국세조사 당시 전국에 153명으로 기록되었으며 1985년 인구센서스에서는 전체 221명(서울 31, 경기 39, 강원 8, 충북 3, 충남 9, 대구 57, 경북 3, 경남 33, 부산 27, 전북 3, 전남 8, 제주 0)이다.

〈12〉全州 甄氏(전주견씨)

▲始祖 甄萱(시조 견훤)

후백제왕 견훤을 시조로 한다. 그러나 그후 여러 대()가 결손, 상세한 세계를 상고할 수 없으므로 견윤을 1세조로 삼고 있다. 본관은 처음에는 완산이었는데 6.25동란으로 호적이 소실되어 다시 제작되는 과정에서 전주 혹은 안성으로 본(本)을 적어 제출하게 됨으로써 본관이 나뉘게 되었다고 한다.

견씨는 고려조 및 조선조의 초기까지에는 출사한 인물들이 나타나 있으나 그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향사(享祀): 매년 음 10월 10일.

▲인구(人口): 서울 125, 경기 212, 강원 9, 충북 51, 충남 8, 대구 14, 경북 9, 경남 32, 부산 17, 전북 2, 전남 22, 제주 1 계 502.

〈13〉黃磵 甄氏(황간견씨)

▲始祖 阿慈介(시조 아자개)

시조 아자개는 상주 가은현의 사람으로 견훤의 아버지이다. 아자개는 원래 백제 아자개 태자 융의 8대손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완산견씨세보에는 신라 진흥왕의 현손이라고 기록되었으며 그의 조부 선품이 가은( 지금의 문경 지방)에 숨어 살면서 이(李)()씨로 성을 바꾸었는데 견훤이 견씨로 고쳐 이때부터 견씨로 창씨했다고 전하고 있다.

견훤은 후백제를 세운 왕으로서 신라 진성여왕 5년 26세의 나이로 무진주(지금의 광주)에서 후백제를 일으켜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 막강한 세력을 키워 신라 및 후고구려와 여러 차례 싸웠으나 왕 44년 후사문제로 내분이 일어나자 왕건에게 투항 경기도 양주를 식읍으로 받게 됨으로써 기호지방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전체 성씨 중 153위를 차지하고 400여명의 후손이 있는 것으로 되었으나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센서스에서는 235가구에 405명이 나타나 있다.

▲인구: 서울 89, 경기 187, 강원 19, 충북 15, 충남 13, 대구 24, 경북 39, 경남 4, 대구 7, 전북 0, 전남 7, 제주 1 계 405명.

〈14〉淸州 慶氏(청주경씨)

▲始祖 慶珍(시조 경진)

경씨는 청주를 관향으로 하는 단본 희성에 속한다. 중국 하내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 경씨의 본관은 청주 이외에 청풍, 평택, 남원, 부안, 보성, 장수 등이 있다고 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청주 경씨의 세거지로 보고 있다.

청주경씨는 고려 광종 11년(960)에 팔학사의 한 사람이었던 경경이 중국으로부터 고려에 나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경경은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부,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의였다. 맑고 희게 절조를 지킴을 정(貞)이라 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어질고 착함을 의(懿)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대의 사실과 연대가 역사에 빠졌으므로 상고할 수 없음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20개파로 분류되는 청주경씨는 고려 명종(1171 ~1197)때 평장공이었던 경진이 벼슬한 이후부터 세대가 이어지고 밝혀졌으므로 경진이 청주경씨의 시조가 된다. 그는 고려 명종때 정의광정대부 평장사문하성사를 지냈으며 우군장으로 서경의 조위총반란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그의 아들 경대승은 정사에서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바 혁혁한 업적을 쌓은 인물로 문음으로 교위에 오른 후 대장군이 되었으며 무신 정중부 일당의 무관정치 횡포가 극심하자 허승 등과 더불어 정중부 일당을 숙청하고 도방정치를 하였으나 3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영걸이다. 경번을 1세조로 하여 전해오고 있다.

그는 고려 고종때 정의대부 호부상서 평장사를 지냈다. 경대승의 후손 경사만 충숙왕비의 질녀와 결혼하여 우대언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경복흥은 가문을 더욱 드높였다. 그는 공민왕때 군부판서로 치사했으며 왕 5년에 기철 일당을 숙청하고 홍건적을 토벌했으며 왕 12년에는 최유가 덕흥군을 받들어 난을 일으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를 격파했다.

그 공으로 좌시중에 오르고 이에 문하시중 청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수충병의 동덕협리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정대부에 시호는 정열이다. 그의 아들 경보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참가한 후 조선조 개국에 큰 공을 세워 태종때 겸교우의정에 올랐고 서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셋째 아들 경의는 청백리로도 유명한데 서북면 병마도절제사를 역임했다.

청주경씨 1세조로 삼고 있는 경번의 묘가 청원군 남일면에 있다고 세보에 기록되어 있고 그 선계인 시조 경진의 묘가 모산에 있고 경대승의 묘 또한 모산에 있다고 고려사에 기록된 것을 보면 청주경씨의 세거지는 경진 대(代) 이전부터 청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청주경씨는 조선조에 와서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없다. 사색당쟁과 세도정치의 탁류에 휩쓸려 밀려난 듯 하다.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17명에 이를 뿐이며 판서, 참판 벼슬에 오른 이도 얼마 안된다.

경습이 태종조 개국원종보의장군 용양순위사대장군 겸 사현중승에 이르렀고 경지는 세종때 문과에 올라 호조판서 진현관제학 집현전직제학 영경연 참찬을 지냈다.

세종때 충주원사에 이른 경여와 성종때 문과에 올라 부제학 황해도 관찰사, 호조참판을 지낸 경세창을 비롯하여 중종때 학자로서 현량과에 올라 홍문관 정자와 저작을 지낸 경세인은 절신으로 대접받고 효자로서 정려가 세워져 세인의 귀감이 된 청백리의 표징이 되기도 했다.

경휘는 부제학에 오른 뒤 불교 재건에 반대 유학의 진흥에 힘썼으며 김안국의 문인이 되었고 명종때 대사간 부제학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참판을 지낸 학공파의 중시조이다.

그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왕을 호위한 공으로 충근정량호성공신에 증직되었으며 랑성군에 책봉된 경종지 선조조 문과 급체후 통신부사를 지냈고 임진왜란 뒤 한일간의 국교 재개에 힘썼고 포로로 잡혀간 1200여명의 백성을 데려왔으며 벼슬이 호조참판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세자 좌부빈객에 이른 경성 등이 문종을 대표하는 선조로 크게 돋보이고 있다.

한편 효종조 문과 급제후 숙종조 충청, 경기관찰사, 현종조 8년에는 사은사겸 진주사의 서상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으며 도승지 예조참판 예문관직제학에 이른 신장파의 중시조 경취 중추원사 증병조참판 경여의 이들로서 세조조 보성군수를 지냈고 청렴하고 공정하게 고을을 잘 다스려서 많은 선정을 베푼 보성공파의 중시조 경유순과 중추원사 증병조참판 경여의 아들로서 평안병사로 나가 당시 북방방위를 튼튼히 했던 병사공파의 중시조 경유공 형제도 유명하다.

이밖에도 경삼은 절충장군 중추부사 경유근 임피 진위현감을 거쳐 덕천군수에 이르러 당상에 오른 다음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정직하고 충성스러웠으며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치는 동안 가는 곳마다 가난하고 궁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백성들에게 옷과 밥을 주는 등 목민관의 표징으로 추앙받았다.

경조도 절충장군 중추부사 경유근의 아들로서 성종때에 의빈도사를 지냈으며 경임은 진산군수 증승정원좌승지 경면의 아우로서 통정대부 진주목사 역임시 진주 주변의 수령 등 30여명이 촉석루에 모여 금란계를 결성하여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 좋은 의견을 모아 각기 그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경수공은 승정원 우부승지 경숙의 아들로서 중종때 문과에 올라 승문박사를 거쳐 홍문교리 진산군수에 이르렀다.

근세에 이르러 경권중을 위시하여 경현수는 성균관 박사 겸 교수로서 경현수 시해사건 후 의병을 일으켜 일군과 싸웠고 3.1운동 때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여러번 투옥되었다. 1914년 북만주 둔전병을 양성하여 일군과 항전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대동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 투옥되었다.

그 후로도 만주로 건너가서 정의부, 신민부, 한족자치연합회, 재만동지회 등을 결성 상해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일군에 항거했다. 해방후에는 한국혁명군사단을 조직 인솔하고 환국하여 광복군지대로 개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후에는 반민특위 충북위원장을 지냈다. 애국지사 경석조도 빼놓을 수 없는 문중의 자랑이 되고 있다.

▲향사(享祀): 10월 첫째 일요일.

▲인구(人口): 서울 3141, 경기 2580, 강원 762, 충북 1329, 대구 203, 충남 584, 부산 435, 전북 111, 전남 86, 제주 7 계 9,238명.

〈15〉泰仁·海州 景氏(태인·해주경씨)

▲始祖 景磋(시조 경차)

고려때 문과에 올라 추밀원부사와 동남도병마사를 지낸후 태산부원군에 봉해진 경차를 기세조로 한다.

그의 선대는 기자가 동래할 때 따라와 평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고 하며 그 시원은 중국 진양의 초공족의 후예이며 동래조는 경여송이라 한다.

그리고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내고 태산군에 봉해진 경상조를 태인파로 좌복야를 지낸 경상록을 해주파로 분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씨는 태인, 해주 이외에도 충주, 치등, 능향, 복흥, 밀양, 장연 등의 관향이 있다고 조선씨족통보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관조가 밝혀진 것은 없다.

경씨는 활을 잘 쏘아 무용이 뛰어났으며 수군첨절제사 경기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후 시산조에 봉해진 경세정, 임진왜란때 많은 무공을 세워 공신에 책록된 경득수, 장락원주부를 지낸 용암 경사의 무과로 선전관을 지낸 경대유 등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태인 관(貫) 인구: 서울 543, 경기 281, 강원 23, 충북 12, 충남 37, 대구 67, 경북 73, 경남 36, 부산 66, 전북 406, 전남 86, 제주 1 계 1,631명.

▲해주 관(貫) 인구: 서울 424, 경기 319, 강원 24, 충북 32, 충남 68, 대구 20, 경북 29, 경남 34, 부산 0, 전북 153, 전남 55, 제주 3 계 1,16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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