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표 소설가의 신작 대하소설 『흐느끼는 하늘과 땅』 연재7

2-어린시절

2025-03-24     장강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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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휑뎅그렁한 들판에 따뜻한 봄볕이 가득 담겨있었다. 명지바람이 솔솔 불어와 봄은 무르익어갔다. 자운영이 흐드러지게 핀 논배미에서는 봄맞이 단장을 마쳤다. 산등성에서는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산들은 연초록의 진솔로 갈아입고 있었다.

신부의 볼에 연지곤지를 찍어놓은 것처럼 곱게 치장했다. 들녘에는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앞이 현기증으로 흐릿한 것처럼 아른거렸다. 울타리 밑에서 오랑캐꽃이 피어나면서 시작 된 봄은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면서 깊어졌다.

해마다 따뜻한 봄은 찾아오지만 마음은 항상 겨울이었다. 사람들은 일본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다 빼앗겨 추위에 떨듯 웅크렸다. 동양척식회사라는 것이 토지를 빼앗아가더니 굶주림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언어까지 갈취하려고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말로 대화하라고 설득, 협박, 압박, 강압하며 억지를 부렸다. 언제 그랬는지 국민은 영혼까지 도둑맞았다. 혼을 잃은 국민은 정신병자가 되었다.

“며칠 째 굶었으니 다리에 힘이 없어 걷기도 힘드네.”

“산중으로 쑥 캐려 갑시다.”

“어제는 논에서 자운영을 몰래 뜯어와 삶아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해서….”

“나물이라도 캐어다가 삶아 먹어야 살지.”

“굶어 죽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어.”

“칙 순이나 취라도 뜯어 와야지.”

“며칠째 끼니를 걸렀는지 몰라. 배가 고파 죽게 생겼으니….”

“냉천 마을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세지에서도 죽었다면서?”

“우리 금정에서도 해 마다 굶어 죽은 사람이 몇 명 씩 되어. 몰라서 그렇지.”

“이 설움 저 설움 모두 합하여도 배고픈 설움만 못하다더니….”

동네 아낙들은 바구니, 망태, 자루, 보자기 등을 들고 산과 들로 나물을 캐려가며 떠들어댔다. 보릿고개인 춘궁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부드러운 칙 순이나 취나물 같은 푸성귀로 굶주린 배를 달래주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매 년 먹지 못해 죽은 사람이 여러 동네에서 생겨났다.

‘나라는 빼앗겼어도 국민은 살아야 하니까. 식량은 일본 놈들이 공출로 모두 빼앗아가고. 나물이라도 뜯어 먹어야 살아갈 수 있어.’

명진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마당에서 삽자루를 손보면서 고샅에서 들려오는 아낙네들의 하소연을 듣고 있었다. 모두가 힘을 잃고 금방이라도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며칠 씩 물만 마시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느루 황,….”

운현은 방에서 큰소리로 천자문을 외웠다. 천자 책은 친구에게 빌려 자신이 손수 써서 만들었다. 틈만 나면 들여다보며 머릿속에 갈무리했다.

내일 밤에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야 되었다. 훈장에게 강 바쳐야 명심보감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열심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틈만 나며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려댔다. 한 자라도 틀리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고 다시 해야 되었다.

“운현아, 날씨 좋다. 들에 가서 소꼴을 베어와야지. 이젠 풀도 제법 자랐을 것이다.”

명진은 방에서 천자문을 외우고 있는 큰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책을 어디서 구해왔는지 집에 있으면 천자문을 외워댔다. 자식의 공부를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아 있어야 지식도 필요했다. 배고파 죽게 되면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서당에 보내달라고 하도 조르기에 어쩔 수 없이 못이긴 척 눈감아 주었다.

먹을거리가 부족하니 식구를 하나라도 줄여야 할 형편이었다. 남의집살이라도 보내야 하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알았습니다.”

운현은 천자 책을 덮고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밖으로 나갔다.

“아는 것이 힘이고 재산이다 하지만 소가 있어야 우리 식구가 당장에 살아갈 수 있다.”

명진은 아들을 달래었다. 집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은 소였다. 가족이 굶을 지라도 소에게는 여물을 주어야 되었다.

“오늘 저녁에 천자문을 강 바쳐야 하는데….”

운현은 하늘을 쳐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해 넘어가기 전에 소꼴을 베어와 소죽을 쑤어야 한다.”

명진은 뒤란으로 돌아가 쟁기를 가지고 나왔다. 부러진 보습을 바꾸어 끼고 부러진 멍에도 손 봐두어야 되었다. 농사철이 되기 전에 고쳐놓아야 파종을 할 때에 논밭을 갈 수 있었다. 씨 뿌릴 시기를 놓치면 가을걷이는 기대할 수 없었다.

“소를 끌고 나가면 안 될까요?”

운현은 헛간으로 갔다. 낫과 망태를 들고 나왔다.

“아직은 안 된다. 소에게 갑자기 생풀을 먹으면 설사를 하니까 조심해야 된다. 봄에 막 돋아나는 풀에는 영양가가 풍부하여 소화가 제대로 안 된다. 짚이나 가을에 베어다 놓은 건초를 썰어 만든 여물과 꼴을 석어 소죽을 쑤어 먹여다 돼. 처음에는 풀을 조금씩 석다가 차츰 양을 늘려 나중에는 풀만 먹여 한다.”

명진은 자식에게 소 사육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른 봄의 생풀은 영양가가 많아 겨우내 여물을 먹은 소에게는 소화가 되지 않았다. 잘못하면 설사를 하고 소화불량으로 병이 생길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생풀을 조금씩 석여 먹이다가 적응이 되면 들로 데려가 노지의 풀을 먹여야 했다.

“알았어요.”

운현은 사립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른 봄에 막 돋아난 생풀을 소에게 많이 먹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천자문을 외우느라 깜박 잊어버렸다.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깊어가는구나.’

운현은 두리번거렸다. 냇가에서는 종달새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들녘에는 아지랑이가 입김을 뱉어내듯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둔덕의 소나무 가지에서는 꾀꼬리가 목청을 자랑했다.〈다음주 계속〉

홍인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