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흠 시인과 떠나는 감성여행84

신작시 - 겨울을 베끼는 거울에서 겨울로 가는

2024-12-16     장강뉴스

발을 헛딛어 웅덩이가 깨어졌습니다
신발에 달라붙은 웅덩이의 파편들

웅덩이보다 커진 물이 웅덩이를 넘어가려 할 때
쪼개진 것은 하늘이었죠

박살 난 웅덩이 바닥은 살 같아서
내 발에 꼭 맞습니다

웅덩이가 내 발에 붙은 건 아닙니다
웅덩이의 가장 밑바닥이 내 몸에 맞춰진 거죠

가슴둘레도 모르는데
아버지가 반팔 티셔츠를 사왔습니다
사이즈는 110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처음 받은 새옷이어서
치마를 두른 것 같았지만
마음은 꼭 맞았습니다

다음 장에 바꿔오마

한 번도 받지 않은 것을 처음 받았을 때는 거짓말 같습니다
귀한 것을 준 뒤에 나중에 다시 준다는 말은 더욱 거짓말 같습니다

물렀다가 다시 한다고 할 때는 사랑의 속삭임처럼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웅덩이는 처음 발을 받아보았는지 표정이 일그러졌습니다

몸에 맞는 옷과 
옷에 맞추는 몸

웅덩이에는 하늘이 비치고
그 하늘을 웅덩이가 더럽힙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아버지의 선물을
제대로 입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마음이 많이 낡은 뒤였지요

좋아한다는 고백을 듣기 전에 손목을 잡았을 때처럼
말하려고 했는데
말하려고 했는데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문 그 입술처럼

웅덩이는 다시 다물어집니다

이대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