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3〉
“죽이지 마시오” 용산면 접정마을 열일곱 처녀가 겪은 한국전쟁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죽이지 마시오” 용산면 접정마을 열일곱 처녀가 겪은 한국전쟁
근현대사 속에서 여성은 주변인이거나 경계에 선 존재였다. 특히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적극적 가담자도 갈등의 주체도 아니었으나 폭력의 최전선에 선 희생자일 때가 많았다.
용산면 접정마을은 독립운동과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장흥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나고 자라며 활동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경계인이었던 한 여성이 그 시대를 어떻게 통과해 나갔는지, 그리고 그 인물들과 동시대의 사람들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듣는 일은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 쓰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을 여러 번 찾아뵈었다.
“찾아오지 마! 한번 했응께. 할 말이 뭐 있어. 내가 이런 말 하고 나믄 꿈에 막 보여. 눈에다 보여부러. 그렇게 오래 돼얐어도. 눈만 감으믄 다 보여부러”.
그렇게 이영남(90세) 씨는 괴롭다 할 말 없다 그러니 다시는 오지말라 하면서도 매번 우리가 갈 때마다 질문 할 사이도 없이 쉼표는 저만치 치워 놓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면에서도 문어체의 정리와 설명을 지우고 그녀의 구술을 계속 따라가 보려고 한다. 한 번도 제대로 귀 기울여 본 적 없었던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소곳이 듣듯이.
◆왜정(일제강점기)과 어린 시절
“나는 학교라고는 못 댕겼어. 아부지가 (여자애들은) 베린다고 안보냈어. 일만 하라 그래 일만.
풀 베라 하고 모시 삼으라 하고 질쌈하고 베 짜고 미영 잡으라 하고 매 그런 거만 했제.
왜정 때는 작은 어메가 여관허고 우리는 농사 지었제. 일제 때 일본놈들이 농사를 지어농께 다 들고 가부러. 한주먹도 안되는 놈들 다 가져가고 개도 껍데기 뱃기서 끌고가고.
놋그릇도 다 가져 가부러. 가마니 치라카믄 가마니 치고. 배가 고파서 밥이 없어서 다 뺏겨불고 솔나무 벳겨서 밥 해묵고 쑥 뜯어서 죽 써 묵고 매 그라고 살았어. 사람들이 못 묵어서 죄 부서부러 (부었다).
우리 집은 논 열두 마지기 밭 일곱 마지기 했는디 괜찮게 산께 아부지가 소를 한 마리씩 잡더만. 큰 집 작은 집 나놔. 그래갖고 쑥국에다 그 놈을 해서 국이라도 묵은께 안붓었어. 그라고 있는 집은 구뎅이를 파 갖고 다문 멫 가마니라도 거그다 감차 놓고 몰래 찧어서 밤에 죽써 묵고 그랬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억
“접정은 마을이 두 개여. 저드리 있고 접정 있고 우리 사는 데는 새테여. 운주 가기 전에 접정이 있고 길 가운데 나무도 심어져 있고 거가 외가집이 있었제.
접정서 이승주가 우리 집안인디 그 집 옆에 유재성 씨가 살았어. 그 사람이 잘생겼어. 키도 크고 좋게 생겼어. 그 집 딸인가도 같이 놀고 그랬어. 근디 그 양반이 독립운동을 해가 지고 우리 아부지 보고도 하라 그라드만. 집에 왔드라고. 그때는 다 친구여. (같이 독립운동한 인천 이씨 이종기 씨도) 그 또래여. 그란디 우리 아부지가 마다 하드만. 나는 장사하는데 그런 머리 쓰것어 그라고. 그래서 우리 아부지는 손 안댔어.
그란디 (유재성 씨는) 나중에 해방되고 수문 갯바닥에 빠쳐 죽여 부렀다고 그라드만. 순갱들이 한 차 싣고 가서 새낙(새내끼, 새끼줄)으로 요로큼 묶어서 유치 사람이랑 다 갖다 수문 갯바닥에 빠쳐 죽이고 후퇴했다고.”
“어산 서쪽 문뱅곤(문병곤)이는 우리 애들 요만했을 때부터 독립운동 그걸 했어. 다 그 사람 촉새에 그렇게 된거여. 좋다헝케 귀가 기울어갖고. 문뱅곤이가 얼굴도 이러콤 크고 몸도 이래 겁나 커.
한번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는디 이렇게 먹고 또 주라케 또 준케 또 묵어. 워매 식구 밥이 다 없어져 부러. 밥을 일곱 그릇을 한번에 묵어. 내가 아저씨 먼 밥을 그러콤 묵소 하니케 나는 일주일 만에 밥을 묵는다 카드만.
그때 보고는 그 사람 안봤어. 그 사람은 어디서 죽었는지 모를꺼. 가족도 남자 찾아내라고 자슥들도 고생 많이 하고 각시도 뒤지게 고생하고 모두 죽었을거여. 제일 죄 없지”.
◆인공과 인민재판
“용산에서 우리 큰집 그 집이 제일 큰케 마당도 널르고, 그 사람들이 요만한 것들이 따발총 다 끌고 왔더랑케. 우리 또래 되는 것들이 그래갖고 우리들 노래 가르쳐줬어 최후의 결전가. 이제 다 잊어부렀어.
마당에다 앉혀놓고 우리 큰 아부지가 어진다고(어지르다) 애기들도 못 올라오게 하는 양반이 겁나 붕 캐 그 사람들한테 집을 다 넴겨줘 버려, 그란케 그 사람들이 비행기가 뜨면 우루루 정지로 들어가고 우리도 들어가라 하고 비행기가 가불먼 또 나오라하고.
궐기대회가 뭣인지 몰라도 궐기대회 하자고 동네 아그들 다 나오라고 해. 겁나 많애. 그라믄 저드리 앞으로 해서 어산으로 해서 그 수가 밤에 쩌그 청전까지 가서 또 돌아와.
이순경이라고 후퇴를 못해서 잽혔어. 그래갖고 냇가에서 인민재판 한다고 나오라고 그란디 무서운께 나가제 반란군들이 그란께. 나간께 그 총각이었어 이순경이 순천사람이여. 총을 쐈는데 나는 애기를 업고 갔는디 내가 막 그 놈(광경)을 보고 발을 문댔는가 이러고 (땅을) 내리다 봉께 떼가
다 파져 부렀더라고. 내가 그 사람을 알어. 우리 집에서 하숙도 하고. 워매워매 그란디 자기들
남편이 죽은 여자들이 와서 죽은 사람 막 칼질을 하더만. 죽어부렀는디도. 워매 어째 징한가.”
◆경찰 수복 후
“달이 여그만치 올라오믄 그 생각이 딱 나. 그때 그 사람들(경찰)이 왔어. 워매 그래갖고 용산서 우리들이 입을 놀렸으먼 싹 쓸어버렸을 것이여.
나하고 우리 집은 지서 옆이라 동네 사람들이 다 우리 집에 와. 그래서 우리 작은 어메도 오고 우리 성 시누하고 오고 그란디, 순경들이 와서 우리보고 마당으로 싹 나오라고 그래. 그란디 이 잡열의 순경이 나는 요사람 뺨 딱 때리게 하고 저 사람은 내 뺨 딱 때리게 하고 줄줄이 세아갖고 염병을 하네.
그래갖고 그 지랄을 하믄서 부용산에 반란군들이 밥해놔라 이라믄 예에 그랄 가시내라고 나보고그래. 내가 예 그랬다 하드 랑케. 정신이 나가니 그라제.
그란디 우리 아재가 달려와서 순경한테 총을 탁 뺏어 갖고 이 아그가 안골에서 숭한 꼴을 겪고 정신이 없는 아근디 그란 짓거리를 한다고 막 그랑케, (순경이) 그런가 하고 가드만. “
◆죽이지 마시오
“임주임이라고 고흥사람인디 그 사람이 지서에 있을 때는 사람 무지하게 죽였어. 죽일 사람들을 잡아다 놓고는 아무개야 이 사람들을 데려왔는디 어짜꺼나 니 말 듣고 죽일련다 그래. (그러면 내가) 이짝 저짝 다 죽이믄 사람 하나도 안 남겄소. 워매 죽이지마소.
용산에서 관산 넘어가는 다리 그 다리 밑에다 너이 죽여 버렸어. 그 우게 냇가로 올라가서는 다섯 명 죽이고 우리 성이 거기서 살아나왔지. 아이구 징해. 먼 죄가 있어서 죽었간디. 그때는 지서라카면 주재소라캐. 거게를 쫒아가 그라믄 그 짝에 죽인 놈들 다 있어.
그라믄 그짝 보믄 막 열이 나그던. (내가 그 사람들 보고) 느그는 안 죽을 줄 알고 그러콤 죄도 없는 사람 죽였냐 그랬어도 우리들이 입 놀려갖고는 하나 사람 안 죽였어. 원수 또지고 또지고 한다고.”(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마을사진:마동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