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김홍철 주필
80년 오월의 광주와 2015년 어느 시골 마을의 오월.
그 해 광주 운암동에서 광산 비아면으로 가는 비포장 길옆의 아카시아꽃 향기는 너무 진했다.
그 향기에 취해 있다가 시외버스를 타고 대인동 터미널에 들어서는 순간 사방천지는 최루가스로 뒤덮였고 여기저기서 비명소리와 함께 아수라장이 되었다. 총에 대검을 꽂은 군인들이 젊은 청년들을 보면 그 자리에서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트럭에 짐짝처럼 싣고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옆구리에 곤봉을 맞고 쓰러지자 공수부대원은 나를 놓아둔 채 바로 앞에 달아나는 다른 두 명의 청년을 쫒아간 사이에 일어나 대인동 비좁은 골목길로 달아났다. 옆구리에 약간의 통증이 있었지만 움직이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구사일생이었다.
바로 1980년 광주의 5월 18일 오후 2시쯤 터미널 대로변의 풍경이었다. 17일 김대중씨와 김영삼씨가 체포되었고 무엇인가 심상치 않는 분위기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백주 대낮에 그것도 군인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시민들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모습에서 멍하니 가쁜 숨만 내쉬어야 했다. 대문이 열려 있는 집으로 무작정 들어가 장독대 옆에 기대 앉아 있었다. 골목길에서는 달아나는 사람들을 쫒는 군인들의 전투화 발자국 소리만이 내 귓가를 맴돌았다. 혼란스러움에 잠시 시간이 정지된 것이다.
오월의 광주가 시작된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 아니 잊으려 해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10일 동안 기억의 조각들은 3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해마다 오월이 오면 내 마음 한구석에 많은 생채기를 만든다. 죽은 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은 아닌가.
그 때 광주는 전쟁터였다. 나라와 국민을 지키라고 젊은 자식들을 군대에 보냈는데 권력욕에 눈이 먼 정치군인들 때문에 적들을 향해 겨눠야할 총부리를 오히려 부모형제들에게 정조준 사격을 한 것이다. 광주 시민들은 억장이 무너진 것이다. 왜 군인들이 아무런 죄가 없는 우리들을 죽이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고 수많은 시민들에게는 정신적으로 공황장애가 온 것이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총성 앞에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대로 죽을 수만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광주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하에 총으로 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두환 노태우를 위시한 정치군인들이 내란목적으로 군대를 사용하자 광주 시민들은 역사의 죄인인 그들에게 용감히 맞선 것이다. 비극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정의의 편에 서지 않았다. 정치군인들은 광주시민들이 흘린 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을 잡았으며 지금도 광주의 모든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그 진실이 모두 밝혀지겠지만 역사는 1980년 오월의 광주를 반드시 기억해야 하고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표되는 정치군인들의 반민족행위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내려 기록해야 한다.
당시 광주를 취재했던 독일기자 힌츠페더는 광주의 모습을 보고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영상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 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가 밝히지 못한 진실을 벽안의 외국인 기자가 그 진실을 밝힌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의 언론들은 부끄러워해야할 일이다.
세월은 흘러 2015년의 오월은 남도 끝자락 강진의 어느 시골 마을에도 찾아왔다. 하얀 아카시아 꽃도 35년 전과 다름없이 그 향기가 진하다. 40여 가구가 사는 이 마을도 지금 총성 없는 전쟁터다.
국가보조금 사업으로 준공한 냉동창고가 문제다. 지역신문에서 보도하자 지역 방송국에서도 연일 방송을 내 보낸다. 조그만 시골 마을이 난장판이다. 확연하게 드러난 사실인데도 아직도 진실게임은 계속되고 있다.
마을 책임자들이 서로 이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느라 상대방을 옭아매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짓도 서슴없이 한다. 사법기관의 조사에서도 허위진술을 불사한다. 물론 수사를 하면 밝혀지겠지만 뒤에 나온 결과에 따라 그 책임을 피하지는 못한다. 자중할 일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책임이 있다면 그 누구도 반드시 그 책임을 회피해서는 아니 된다.
35년 전 광주의 오월을 기억하면서 이번 강진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오월을 생각하자니 필자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