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주인공 18 - 장흥군 용산면 변길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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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주인공 18 - 장흥군 용산면 변길순 할머니
  • 조창구 기자
  • 승인 2017.09.02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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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와 한 집에 살던 시아제의 5남매, 키우며 넷 대학까지 보내

엄마가 된 큰 엄마 변길순 여사 “같이 살며 정들다 보니 엄마가 돼”

 

▲ 변길순 할머니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천륜이라고 한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뜻이다. 부모가 자식을 정성들여 키우는 것은 본능에 따른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도 간혹 천륜을 저버린 자식이나 어른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그만큼 당연한 일처럼 보이는 부모나 자식노릇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계부나 계모의 학대로 숨진 아이들 이야기는 뉴스에 더 자주 오르내린다. 자신외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준 타인의 도움이나 보살핌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 큰 엄마였다 엄마가 된 변길순(97) 할머니의 사연을 소개한다. 이 사연을 전한 아들이 된 조카의 큰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에 혹여 어머님께 누가 될까 조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치매오시기 전에 ‘잘 사셨네’ 소리 듣었으면 한다는 아들의 마음을 먼저 전해야 할 것 같다.
용산면 월송리 재송마을 솔치에 살고 있는 변길순 여사는 올해 97세다. 조카인 오남매를 맡아 네명의 남자 조카들을 대학까지 마치게 한 대단한 큰어머니이자 어머니다. 자식들의 기억에 언제나 당당했던 큰어머니이자 어머니였지만 이젠 세월의 무게앞에 기력도 쇠해져 허리수술을 받아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고 보청기를 껴야 얘기를 할 수 있다.

 

 

▲ 변길순 할머니와 넷째 아들 위종만

발음이나 전달력도 젊은 시절만큼은 못하다. 그래도 뉴스를 보고 평을 할 만큼 총총하시다. 사리분별이나 깔끔함도 여전하셔서 시골집 마당앞 텃밭은 잡풀 구경하기 힘들 정도다.
먼저 백세를 바라보고 있는 고령의 변 여사의 소식습관이 건강비결이란 얘기를 듣고 물으니 할머니의 답변은 “자식들이 잘 하니 맘 편해 건강한 것 같다고 건강장수비결을 자식들 덕으로 돌린다.
과연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큰 엄마가 엄마가 된 것일까? 왜 엄마가 되셨는지 물으니
“그놈의 정이 무엇인지...”하신다. 이 말에서 한 집에 살면서 친자식처럼 똥오줌 가려주었던 조카들에 대한 애정이 젊은 큰 엄마를 붙들어 놓은 것임을 느끼게 된다.

▲ 변길순 여사 팔순잔치 가족사진

1921년생인 변길순(97)여사는 19살에 인근 관산읍 갓두(오동)마을에서 시집왔다. 섣달 그믐날에 시집와서 동네에서 '떡각시'로 불렸다. 시부모님과 시아제 등과 함께 살다 27살에 과부가 됐다. 시댁은 3남1녀 중 첫째아들 위학현은 일제강제징용에 끌려가 1942년 남양군도에서 사망한 상태라 사실상 집안의 큰 며느리로 들어온 셈이 됐다.
한집에서 살던 시아제도 직접 여위고 한집에서 아랫동서네와 살았다. 그러다 건강이 좋지 않던 남편이 8년만에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게 됐다. 독립해 살림을 않고 한 집에 살면서 아랫동서의 애들을 받아다 키우며 똥오줌을 가려줬다. 애들도 큰어머니인 변길순여사를 큰방엄마라 부르고 어머니를 정재(부엌의 전라도 사투리)엄마라 부르며 누군지 모르고 한 가족처럼 지냈다.
일본에서 공부하다 온 시아제는 두 형을 보낸 슬픔에 젖어 술을 가까이했다. 형수인 변길순 여사에게 애들 보고 “내 자식 아니여 아짐 자식이다”더니 말이 씨가 됐다고. 그러면서 재산관리를 책임졌다. “당시 시아제가 믿고 맡겨서 그랬지 간섭했으면 못살았을텐데... ”하신다. “그러고 보면 ‘숭굴숭굴한 사람’이여” 시아제이자 위종만 장흥문화원 사무국장 부친인 위백운씨에 대한 변길순 여사의 평이다.
독학으로 한글을 떼고 부산에까지 쌀장사를 다니며 재산을 늘릴 만큼 똑똑하고 야무졌던 변 여사. 홀몸이라 재혼요청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더 늙으면 할려고 맘 먹었는데 한번 들어앉으니 포기하게 되더라”고 말한다. 이후 서울로 올라가 숙박업을 하면서도 조카들 도시락 싸서 학교에 보내며 부모노릇을 대신했다. 시아제 내외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조카들을 돌보는 일은 오롯이 변길순여사의 몫이 됐다. 그렇게 엄마가 됐다.

▲ 동네 어르신들

돈 많은 부자가 좋아 보이지 않고 공부 잘 하는 것만 좋아 보였다는 변길순 여사. 조카 4명을 항공대(위종신)와 한국외대(위종일), 경희대(위종국), 한성대(위종만)에 보내고 친정집 여조카도 데려다 가르쳤다.
그렇게 정성들여 키운 조카이자 아들들이 용하고 말 잘 들었었는데 그래도 며느리 생기니 남이 되더라며 다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고 한다.
요즘도 자식들에게 늘 형제간 우애있게 잘 살아라고 당부하고 자신이 할 일만 잘 하라고 하신다. ‘나 좋으면 궂은 사람 없다’는 것이 변길순여사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체득한 신념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한 마디 부탁하니 “요즘 젊은 사람들 늙은이 말 안들어”라며 “돈있고 배우면 잘 난 줄 안다. 곡식 여물면 고개 숙이는데 사람도 아닌 것이 문제”라고 쓴 소리를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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