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칼럼 - 정윤식(국립한글박물관 후원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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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 정윤식(국립한글박물관 후원회 정회원)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6.06.02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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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문화와 민족정신의 수호 - 下

▲ 정윤식 선생
우리말과 글의 발전을 위한 피나는 노력으로 한글이 만들어지던 그 당시에 있어서는 소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고 그 뒤에도 그 정도는 그에 미치지 못했으나 소리연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말본의 연구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것은 중국의 영향 때문이었다.
갑오경장이후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게 됨에 따라 우리나라 학자들도 소리연구에만 그치지 않고 말본의 연구로 시야를 넓히기 시작하였는데 그 시초는 이봉운의 〈국문정리,1897〉이다.
그는 그 서문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한문만 숭상하고 제 글은 아무 이치도 알지 못하니 참 침통하다. 우리 문명에 제일 요긴한 것은 국문이니 이 이치를 밝혀쓰고 또 교육해야만 나머지 여러 일이 다 그로부터 나와 잘 될 것이다’라 하고 완전히 한글만으로 설명을 하고 있으니 한글과 우리말에 대한 수호발전의 노력이 비로소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관보의 한글 사용 법률명령은 국문으로서 본을 삼는다는 칙령, 유길준의〈서유견문〉의 발행, 순한글로 된 독립신문의 발간, 이봉운의 국문정리의 간행 등.
갑오경장 이후에 일어난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모두 한문과 한자의 굴례에서 벗어나서 우리글, 우리말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근본적인 의도의 발로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을 한 몸에 받아서 말과 글을 나라 바탕에까지 결부시켜 그 연구와 보급에 한평생을 바쳐 뒷시기에 큰영향을 미친분이 주시경이다.
한힌샘 주시경(1876-1914)은 황해도 봉산출신으로 어릴 때는 남들처럼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문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노력의 낭비인가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우리 말이 있고 우리 글이 있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말인 한문과 남의 글자인 한자를 배워야만 행세를 할 수 있고 학문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큰 잘못임을 그는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의 18세의 나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각 문명 부강국이 다 자국의 문(文)을 용(用)하며 막대한 편의를 취한다 함을 듣고 아국 언문(言文)을 연구하여 국어문법짓기를 시(始)하다.
이때 벌써 그는 국어문법의 저술에 착수했던 것이나 그 뒤 그는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민주주의적 사상의 감화를 받았고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독립신문을 내는데 중요한 일을 맡아 그 당시의 애국운동과 말과 글의 수호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국어문전음학,1908〉,〈국어문법,1909〉,〈말의 소리,1914〉의 저술을 내고 갖은 고초를 겪어가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국어학의 기초를 닦음과 국어학자의 정신적 자세를 확립하는데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각 인종의 언어도 각자가 같지 아니하니 이것은 하늘이 그 구역에 그 인종이 살기를 명하고 그 인종에 그 말을 명하여 한 구역의 땅에 한 인종을 낳고 한 인종의 사람에 한 가지 말을 내게 함이라 그러므로 하늘이 명한 성을 따라 그 구역에 그 인종이 살기 편하여 그 인종이 그 말을 내기 알맞아 천연의 사회로 국가를 만들어 독립이 각각 정해지니 그 구역은 독립의 터전이요.
그 인종은 독립의 몸이요, 그 말은 독립의 성(性)이다.(국어문전음학-이글은 원래 국한혼용문체로 되어 읽기 힘들기 때문에 쉽게 풀어 고쳤음)
그는 여기에서 말이 독립의 ‘성’ 임을 강조하고 이어 자기나라를 보존하며 자기나라를 일어나게 하는 길은 나라의 바탕을 장려함에 있고 나라의 바탕을 장려하는 길은 자기나라의 말과 글을 존중하여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이 어떤 나라의 말과 글만 같지 못하더라도 자기나라의 말과 글을 갈고 닦아 기어이 만국과 같아지기를 도모해야 할 것이거늘, 우리는 단군이래로 덕정을 베풀던 그 훌륭한 말과 글자를 연구한 일이 없다.<국어문전음학>
자기나라의 말과 글을 존중하여 써야만 나라의 바탕이 굳건해지며 나라의 바탕이 장려되어야만 나라를 보존하고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국어연구의 기본적인 자세를 명백하게 알 수 있다.
한 민족의 말은 그 민족의 창조적 정신활동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의 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우리이다.
그리고 글은 그 말을 감싸주는 옷이다.
그러므로 민족의 말과 글을 존중하여 쓰지 않는다면 민족정신이 바로잡힐 리 없으며 민족정신이 바로 잡히지 않은 나라의 바탕은 허물어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그 당시의 사회적 불안과 국가의 위기를 직감하면서 그 먼 원인을 말과 글의 무정부상태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말과 글을 연구하고 지키고 발전시켜 나아가는데에 한평생을 바쳤던 것이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난 뒤 570여년 동안 우리글은 민족의 문화를 꽃피우는데 제 구실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역사의 밑바닥에서 살아왔었다.
그러나 19세기 말기 새 바람이 묵은 강토에도 일기 시작하자 한글도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뜻있는 사람들이 많이 한글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여 한문 대신에 우리말을 써야 함을 깨닫고 한자 대신에 우리 글을 써야 함을 외치게 되었는데 그 근본 동기는 다음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만국이 다 자기나라 말과 자기나라 글을 써서 상하귀천, 남녀노소가 다 읽을 수 있는 인쇄물을 발간하여 모든 사람이 다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국가가 부강하게 되어가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니 이러한 묵은 풍습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
둘째, 자기나라의 말과 글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결국 그 나라의 바탕을 장려하는 길이기 때문에 이것을 소중히 여겨쓰고 바로잡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것이다.
유길준, 서재필, 이봉운, 주시경 등 선각자에 의해 말과 글에 대한 이러한 자세는 그 뒤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니 일제 강점기에 갖은 탄압을 무릅써가면서 우리말과 글의 수호?발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애국지사들은 모두 이러한 정신적 자세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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