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칼럼 - 정윤식(국립한글박물관 후원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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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 정윤식(국립한글박물관 후원회 정회원)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6.05.2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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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문화와 민족정신의 수호 - 上

▲ 정윤식(국립한글박물관 후원회 정회원)
한글이 만들어지면서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어 진정한 민족문화의 꽃이 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인 일상생활의 편지 왕래에서부터 시작해서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활동은 한글을 쓰면서 비로소 꽃피기 시작한 진정한 민족문화의 정수였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상이나 언어를 이해하는 데도 한글은 중대한 중간촉진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상류 양반계급에 있어서는 여전히 과거 인습을 버리지 못하고서 오로지 한문 학습에만 주력하였고 그들이 쓰는 글은 한문에만 의지해왔다.
국가의 공용문서는 반드시 한문이라야 했으니 땅이름, 사람이름 따위가 우리 토박이말로 되어있는 것이 공용문서에 올릴 때는 한자로 둔갑해야만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정말 웃지 못 할 일이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은 그대로 유지될 리가 없었다.
고종 31년(1904년) 김홍집 내각은 정권을 잡고 청나라와 맺은 조약을 폐기하고 그 종주권을 부인하며 개국하고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는 그래도 일신되는 듯하였다.
관계를 개혁하고 계급을 타파하고 사민(四民)평등원칙아래 노예를 해방하고 과부의 개가를 허용하며 그렇게 심하던 적서(嫡庶)의 차별을 없애고 과거제도를 폐지하는 등 자못 혁신적인 정책으로써 일반백성들의 대단한 호감을 샀다. 이것이 곧 「갑오경장」이다.
관보에 한글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그전까지는 국가의 공용문서에는 한글은 끼어들지를 못했는데 이때야 비로소 한자와 한글이 혼용된 글이 관보에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글자생활의 한 시기를 긋는 극히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고종 32년(1895)에는 ‘법률 명령은 다 국문으로써 본을 삼고 한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란 칙령을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한글은 비로소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는데 이 역사적 전환기의 선구자는 유길준이다.
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유견문」(1895년 간행)을 지어 내었는데 그 문제는 ‘국한문혼용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으로 보아서는 매우 이상한 것이나 그 당시로는 혁신적인 큰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있어서는 학자의 이러한 저서는 반드시 한문으로 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포 김만중이 “학사대부의 한문으로 된 글이 앵무새 사람 말 흉내와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통렬하게 비판했으면서도 자기의 글은 한문으로 된 것이었으니 학문적인 글은 한문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한글이 만들어졌음에도 추호도 후퇴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유길준은 국한혼용문으로 큰 책을 써내었으니 그때 이에 대한 반대가 매우 심했다.
그러나 그는 다섯 가지 이유를 내세우면서 자기의 초지를 꺾지 않았다.
첫째, 일반 민중에게 소개하여 민지의 계발을 하기 위해서는 글이 쉬워야 한다.
둘째, 자기의 한문지식이 부족하여 자기가 듣고 본 것을 다 표현하기 어렵다.
셋째, 외국과 문호를 텄고 따라서 그 사정을 몰라서는 안 될 터인데 모든 사람이 다 알게 하기 위해서는 쉬운 글자 친근한 말로써 해야 한다.
넷째, 중국의 글자인 한자를 아주 버리고 한글만으로 쓰지 못함이 유감인데 이것은 오늘의 사정에 맞게 하기 위함일 따름이다.
다섯째, 순한문을 쓰지 않은 데 대한 옳고 그름은 차라리 뒷사람의 판단에 맡길 것이다.
이런 조목들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대단한 주장으로서 과연 뒷사람의 판단이 어떠한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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