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김금( 장흥군보건소 건강증진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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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김금( 장흥군보건소 건강증진계장)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6.03.2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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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義岩) 주논개(朱論介) 순국정신을

▲ 김금(장흥군보건소 건강증진계장)
주논개는 1574년 9월 3일 갑술의 특이한 사주를 가지고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태어나셨다. 논개 나이 5세때 부친 주달문은 별세하고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하고 숙부는 어린 조카를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아 달아나 버렸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 관아에 수감되었다. 논개 6세때 이른 봄 장수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려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돌아갈 곳 없는 모녀는 침방관비를 자청하여 김씨부인의 배려로 내아에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되었다. 늦가을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전직된 최경회를 따라갔다가 논개 9세때 최경회가 영암군수로 전직되어 그를 따라 논개 9세때 최경회 사도시정으로 갈 때 수행을 하고 17세가 되어 최경회의 후처로 되었다.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인 화순으로 갈 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와 기다리며 살아간다. 논개 19세때 최경회 전라우도 의병장으로서 장수로 와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킬 때 논개는 의병훈련 뒷바라지를 하였다.
논개 20세때 최경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전투를 할 때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하였다. 논개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했다(2차 진주성싸움). 일본군 왜장들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남편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되었다.
논개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벽류(碧流)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진주남강에 몸을 던졌다.
그 훗날 이 바위를 의암()이라 불렀으며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다. 1846년(현종12년) 당시 현감 정주석이 장수군 장수면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논개의 묘비와 논개의 사당을 건립(1956)하고 논개부모 묘비봉분을 지었고 단아정(丹娥亭,1986)을 건립하였다.
논개의 성은 주(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전북 장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사망하고 집안이 어려웠으나 효행 또한 항아(姮娥)보다 더 아름다운 논개의 지극한 충성과 효심의 얼을 상징함은 오늘날 그 얼이 높이 선양되어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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