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김미봉 강진군보건소 건강증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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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김미봉 강진군보건소 건강증진팀장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6.03.2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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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申師任堂) 그는 누구인가? - 下

▲ 김미봉 강진군보건소 건강증진팀장
사임당의 남편 이원수(李元秀)공은 유년기(6세)에 부친이 타계했기에 편모(홍씨) 슬하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했으나 학문이 높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사임당은 남편에게 학문에 전념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하지만 그는 풍류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자 사임당이 “우리의 자식들을 훌륭히 키우자면 부모의 지도가 10명의 스승보다 나은 것이니 서방님은 높은 학문에 오를 때까지 한성(서울)에 가서 학업에 전념토록 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대관령을 넘다말고 처가로 되돌아가기를 수차례했다.
이 행태를 본 사임당은 남편에게 당신이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학문을 게을리 하면 나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겠다며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자르려하자 당황한 남편은 깊이 뉘우치고 한성에 가서 학문에 정진했다.
하지만 학문이 과거시험을 치를 수준에 이르지 못한 남편은 벼슬을 얻고자 권세가인 친척집을 출입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사임당은 권세가에 접근하면 후일 어떤 화(禍)가 미칠지 모르니 경세지교(經世之敎)나 공부하셔서 우리 자식들이나 훌륭히 가르치자고 권고했다.
이원수 공은 아내인 사임당의 뜻 깊은 의견이 옳다고 생각해서 적극 호응했다.
얼마 후 사임당의 예언대로 1545년(명종 원년)에 선비들이 억울하게 다수 화(禍)를 당한 을사사화(乙巳士禍:소윤파가 대윤파를 숙청한 사건)가 일어나 이원수 공이 출입하던 권세가 집안은 큰 화를 당했지만 이원수공은 무사했다.
이는 사임당의 높은 학문과 선견지명 그리고 자기분수대로 살고자 했던 신사임당의 지혜로운 인생관이 곧 남편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아내로서의 훌륭한 내조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끝내 이원수 공은 과거에 응시 못하고 50세에 이르러 비로소 권세있는 친척의 도움으로 수운판관(水雲判官)을 역임하던 중(1561년) 61세로 타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임당은 그보다 앞서 1551년(명종6)에 향년 48세로 별세했다.
이들 부부의 아들 율곡이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었기에 후일 이원수 공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신사임당은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여성의 대표적 사표(師表)이고 겨레의 어머니라 일컫는 신사임당을 추모하고 재조명함으로써 여성의 귀감으로 삼아 계승코자 대한주부클럽연합회 주최로 매년 양력 5월27일에 가장 훌륭한 사회활동으로 타의 귀감이 되어 존경받고 덕망높은 여성 한 사람을 당년의 사임당으로 추대 사임당대관식을 거행하고 있다.
신사임당 선생은 비록 48세라는 그리 많지 않은 인생을 살다가셨지만 46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당시에 시대를 앞서간 겨레의 어머니로서 추앙받아 후세들로 하여금 그의 유훈을 기리며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동문리내의 신사임당영당(師任堂平山申仁善先生神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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