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장흥사인정은 김구선생의 중국임시정부 망명과 관련 없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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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장흥사인정은 김구선생의 중국임시정부 망명과 관련 없다.(上)
  • 장강뉴스
  • 승인 2023.03.2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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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사인정 앞에는 2005년에 설치된 잘못된 홍보안내판이 있다-

 

사인정은 장흥군과 강진군의 경계지점(장흥군 장흥읍 송암리 산 359번지)인 탐진강 상류 장흥읍 금강천과 장흥읍 예양강이 합류하여 흐르고 있는 설암바위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건물은 3칸 겹집에 팔작지붕으로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병길
문병길

조선시대 1453년에 수양대군이 단종 임금을 폐위하자 나라가 혼란해져 중앙부서 관리였던 김필(1426~1470)선생이 장흥지방으로 낙남하여 지냈던 곳을 후손들이 정자를 짓고 김필 선생의 당시 사인(舍人:정4품직)벼슬 명칭을 사용해 사인정이라 했다.

필자가 주장한 내용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김구 선생은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가는 길에 사인정에서 1박하지 않았으며, 사인정 주변 바위에 새겨진 ‘제일강산(第一江山)’ 암각문이 김구 선생의 친필인지 연구가 필요하다.

◆ 사인정 앞에는 2005년에 설치된 잘못된 홍보안내판이 있다

...(상략)...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전국 최초로 실시한 총선거 유세차 백범 김구 선생께서 장흥초등학교에 오셔서 2천명 청충앞 연단에서 ”나는 장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나와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본인이 상해임시정부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이곳 사인정에서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1박하면서 지친 몸을 쉬여간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라고 직접 말씀하신바 있다. ...(하략)... 라고 사실과 다르게 적혀 있다.

▶ 김구 선생은 장흥초등학교에서 언제 선거유세 했는가?

김구 선생은 1948년에 장흥초등학교에서 총선거 유세한 것이 아니고 1946년 9월 22일 또는 9월 23일 날 유세한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왜냐하면 김구 선생은 인천감옥소에서 탈출(1898년 3월 9일)하고 도망자로 다녔던 연고지를 43년이 지난 후에 찾아다니면서 특별강연(유세)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은 1946년 9월 14일부터 10월 4일까지 당시 입법의원인 민선의원 45명과 관선의원 45명을 뽑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되는 선거를 앞두고 한국독립당의 조직 강화를 위해 특별강연(선거유세)를 했다.

참고로 김창수(1876~1949, 안동김씨, 훗날 김구 라는 이름으로 개명)는 1896년 21세 때 황해도 해주 치하포 주막에서 한국인으로 변장한 일본사람 쓰치다 조스케 군인장교를 만났고,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 일당으로 잘못 알고 그 일본인을 죽여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황제의 특사로 사형이 중지된 후 인천감옥소에서 1년8개월 수감하다 탈출했다.

▶ 김구 선생이 중국 상해임시정부 망명길에 사인정에서 1박 하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임시정부 망명길에 사인정에서 1박했다고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구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했던 방향은 황해도 해주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단동에서 이륭양행으로 가는 배를 4일 동안 타고 상해 푸동 나루에 1919년 4월 13일 도착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김구 선생이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는 길에 사인정에서 1박했다고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 잡으려고 「백범일지(도진순 번역, 돌베개 출판사, 1997년 발행)」의 중국 상해 임시정부 망명부분 내용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당시 43세 김구 선생은 3.1운동을 맞은 것은 그의 고향 황해도 안익군 동상평 농장에서였다. 서당 같은 학교에서 농촌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리키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하던 때다.

김구 선생이 ‘만세운동’을 거부하는 이유와 중국으로 탈출하는 과정 즉, 만세는 젊은이들이 부르면 되고, 김구 자신은 장래계획을 위해 중국으로 떠난다는 말이다. ...(중략)... 지체할 수 없는 형편을 보고 즉시 출발하여 사리원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신의주행 기차에 올랐다.

나는 중국인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 큰 다리를 지나서 안동현의 어떤 여관에서 변성명(이름을 바꿔 부름)을 하고 좁쌀장수라 하고서 7일을 경과한 뒤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했고 4월 12일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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