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 영화 ‘한산’을 볼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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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 영화 ‘한산’을 볼 결심
  • 장강뉴스
  • 승인 2022.09.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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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역사연구자)

영화 ‘한산’이 지난달 개봉되었다. 이순신 수군의 활약을 그린 영화 ‘명량’(2014)의 후속작이다.

한산도 대첩이 1592년 7월의 일이고, 명량해전은 1597년 9월의 일이니 프리퀄인 셈이다.

김태희
김태희

이순신 수군의 활약은 아주 값진 것이었다. 그런데 수군과 의병의 활약이 임진전쟁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임진전쟁은 한반도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본격적으로 충돌한 최초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혹은 해양세력을 막는 울타리로 여기는 발상이 이때 나타났다.

한반도 분단의 아이디어도 이때 나타났다. 임진전쟁은 동아시아 삼국이 충돌한 국제전쟁이었다.

전쟁 결과 일본에서는 전쟁 중에 힘을 보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에도시대를 열었고, 중국에서는 그 틈에 세력이 성장한 누르하치의 여진족(만주족)이 장차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그에 반해 전쟁터가 되어 국토가 유린되었던 조선은 오히려 왕조가 유지되었다. 근대 동아시아 질서의 기원을 임진전쟁에서 찾기도 한다.

그 중요성에 비추어 ‘임진왜란’이란 이름은 문제가 있다. ‘왜란’이란 용어는 단순한 소란이나 난동 수준으로 오해할 소지가 높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사용된 역사 용어는 수용하려는 입장이지만,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방해한다면 좀 생각해볼 문제다. 필자는 학계의 일각에서 사용하는 ‘임진전쟁’이란 용어를 따르고자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조선의 역[朝鮮之役]’이라고 불렀다. 명나라 연호인 ‘만력(萬曆)’을 앞에 붙이기도 한다.

최근에는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도 하는데, 일본에 대항해 조선을 도왔다는 뜻이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본에서는 일본 연호를 붙여 ‘분로쿠-게이초 노 에키[文祿-慶長の役]’라고 부른다. 에도시대, 메이지시대에는 ‘조선정벌(朝鮮征伐)’, ‘정한(征韓)’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그다지 평가하지 않았지만, 민간에서는 도요토미를 영웅시하는 이야기들이 유행되었다.

조선과 대륙을 침략한 메이지 세력은 도요토미의 조선침략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름도 그렇지만, 임진전쟁 실상의 인식을 방해하는 것들이 적지 않다. 전쟁 후에 이뤄진 논공행상도 그렇다.

임금과 피난길을 함께 한 공로의 호성공신은 86명인 반면, 전쟁에 참여한 공로의 선무공신은 고작 18명에 불과했다.

곽재우 같은 의병장은 아예 빠졌다. 심지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의병장도 있었으니 더 무슨 말을 하랴.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싸운 사람보다 도망에 급급한 선조 임금을 따랐던 사람들이 공로를 더 인정받았던 것이다.

임진전쟁은 1592년(임진년) 4월에 시작되어 1598년 11월까지 7년이 걸렸다. 1593년 7월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물러났다가 강화협상 결렬로 1597년(정유년) 7월 일본군이 다시 본대가 부산에 상륙하기까지 4년의 소강상태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에도 일본군 일부가 왜성을 쌓고 눌러 앉아 있었다. 그래서 전쟁은 제1차 전쟁, 대치 기간, 제2차 전쟁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2차 전쟁이 재개된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끈 수군이 궤멸적 패배를 했다. 그 후 9월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지휘권을 회복하여 13척의 배로 승리를 거둔 전투가 바로 명량해전이었다. 극적 요소가 다분했다.

한편, 제1차 전쟁 때 이뤄진 한산도 대첩(1592년 7월)은 개전 초 일방적 패퇴 속에 이뤄낸 것이라 그만큼 더 값진 것이었다.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5월 3일 한양을 점령했다. 그 사이 조선군은 거의 혼비백산의 지경이었다.

그러나 5월 이후 수군과 의병의 활약이 흐름을 바꿨다. 이순신 수군의 승리는 전라도를 보호하고, 일본 수군의 서해진출을 차단했다.

6월 15일 평양성을 점령한 일본군이 더 이상 북상하지 못했고, 도요토미는 배를 타고 직접 조선에 건너오려던 계획을 접어야 했다.

많은 사람이 살상되고 일본에 붙잡혀 간 전쟁을 승리했다고 강변하거나 승리한 전투만 기억하는 것은 ‘국뽕’이라 하겠다.

실패의 경험에서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임진전쟁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는 디딤돌로 삼는다면, 영화로 이순신의 활약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도 영화 ‘한산’을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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