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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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22〉
  • 장강뉴스
  • 승인 2022.06.0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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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면 옥련마을 양씨 집안에서 일어난 일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장평면 진산리 옥련마을 전경
장평면 진산리 옥련마을 전경

 

장평면 옥련마을 양씨 집안에서 일어난 일

‘어느 청년의 쓸쓸한 귀향, 그리고 그 이후’

전남 장흥군 장평면 진산리 옥련마을에 살던 양용승(1934년생)은 사촌이자 친구인 양도승(1934년생, 입산 후 행방불명)과 함께 장평동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함께 어울렸다. 그들은 마을에서도 똑똑하고 야문 청년들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같은 해 7월 28일 장흥군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게 되자, 장평면 내동마을에 살던 김명식(가명)은 장흥군 농민위원장에 취임한다.

이후 각 부락 농민위원회에 학습회를 조직게 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등 활동을 하는데, 이때 주변 마을에 살던 많은 청년들이 영향을 받아 좌익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자발적인 협조자도 있었지만, 강제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당시 17살 젊은 청년이었던 양용승과 양도승도 그 흐름에 휩싸여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동조하게 되었다. 하지만 억지로 완장을 채워버린 인공시절이 지나고 경찰 수복이 되자, 경찰의 감시를 피해 산으로 들어간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빨치산 또는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이들의 존재는 아픈 멍에가 되어 이후 가족들이 연좌제의 늪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된다. 마을이 소개되고 피난을 안 가면 빨치산 앞잡이로 몰리던 상황에서 양용승의 가족들은 화순 종갓집으로 피난을 간다.

부모님의 종용에도 양용승은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피신하게 되면 그 피해가 부모님께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오래갈 수 없었다. 잠시 방심한 틈을 타 그를 감시하던 경찰들에 의해 붙잡혀 광주형무소에 구금되고 만다.

“어떻게 잡혀 가신지도 모르고 무슨 활동 하셨는지도 모르고, 경찰이 왔다 갔다 함시로도 물어 보도 안 해, 틀림없이 요것들이 먼 속셈이 있을 것인디. 그란디 하루 저녁에 형님이 왔어, 밤에 아버지를 만났재, ‘가자 큰집 종가댁이 좋더라’, ‘내가 가고 없으면 아버지 어머니한테 피해를 주니까 어쯔깨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밤에 왔다 밤에 넘어간 거여, 안가면 지적을 당항께 강제로 따라 댕긴거재. 그라고 며칠 후 마을이 소개 된닥항깨 우리 가족들은 화순 종갓집으로 피난 갔지, 밥그릇 몇 개하고 솥단지 짊어지고. 이짝은 사람이 살 수가 없었어, 조금만 살면 소개시켜버리고 이 지랄 하면서 살았어요. 그란디 형님이 죽게 되니까 교도소에서 기별을 했등만. 거기서 인자 화순 도림역에 내려놔, 아버지랑 집안사람들이 가서 지게에 지고 왔재, 그 뒷날 저녁에 돌아가셨어, 나중에 들어봉깨 고문하고 뚜드러 패고 그걸로 인해서 병을 얻은 것이락 해,” (증언, 양용승의 동생 양찬승_1941년생, 당시 12세)

장동면 진산리 마을회관 앞_좌로부터 문락성 . 차종준 . 양찬승 . 양동일(당시 상황을 증언해 주신 마을 주민과 가족)
장동면 진산리 마을회관 앞_좌로부터 문락성 . 차종준 . 양찬승 . 양동일(당시 상황을 증언해 주신 마을 주민과 가족)

 

1952년 7월 무더운 여름, 양용승(당시 19세)의 아버지 양회윤(1903년생)은 광주형무소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구금되어 있던 아들이 출소하니 데리러 오라는 것이었다. 화순군 도림역에서 아들을 건네받은 양회윤은 축 늘어진 아들을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혹독한 고문과 폭행으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은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광주형무소에서는 구금되어 있던 양용승이 죽게 되었으니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었던 고향 집에 돌아온 지 단 하루만이었다. 축 늘어져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마주하게 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득한 절망과 함께 체념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말기를 빌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바람마저 외면했다.

그로부터 25년 후인 1977년 3월 28일,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이던 양춘승은 “대학인들이여 잠을 깨라!”로 시작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작성해 발표하다가 관계당국의 수배를 받아 한 달 동안의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반독재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선포된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피해자가 된 순간이었다. 양춘승은 25년 전 광주교도소에서 고문에 의한 후유증으로 죽임을 당한 양용승의 동생이다.

2019년 4월 29일 자 한국일보(정반석 기자)에 따르면, 유신정권은 양춘승을 붙잡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을 압박했다고 한다. 시위 현장에서 붙잡힌 친구는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대며 “양춘승의 행방을 대라”는 협박을 받았고, 양춘승의 형인 양찬승(1941년생)은 영장도 없이 연행돼 독방에 감금된 뒤 “간첩으로부터 받은 돈은 어디 있냐”고 취조당했다.

양춘승은 결국 자수했고,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징역 1년 6월 실형을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유신 철폐”를 외치다 징역 1년을 추가로 선고받았으며, 1979년 7월 제헌절 특사로 가석방될 때까지 2년 3개월간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양춘승의 아버지 양회윤(1903년생)은 아들이 간첩이란 얘기와 형사들의 집요한 수색과 방문에 화병이 생겨 식사도 제대로 못 하다 돌아가시고 말았다. 양춘승은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는 판단이 나온 2013년에서야 재심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란디 여기서 인자 태어나갔고 광주고를 가고 서울대를 갔어요. 유신독재시절이었는디 말만 거시기해도 경찰들이 잡아가는 판이여 무조끈. 그래가꼬 억지로 징역을 3년인가 살았어요, 동생을 간첩이라고 함시로 공산주의자로 몰아가꼬. 그란디 동생이 도망 댕길 때 경찰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와, 하루는 나보고 오락하드라고, 광주 화정동으로 가자고 해, 가봉께 안기분가(중앙정보부) 뭔가 있등마, 대공분실 지하로 데리고 가. 돈 받아먹었냐고, 돈 얼마나 줬냐고 그따위 소리를 해요, 난 암껏도 모릉깨 알아서 하씨요 그랑깨, 조서를 쓰라고 한단 말이요? 즈그들이 또박또박 불러주등만, 얼마나 된깨 그것이 나한테 돌아와 내가 진술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양찬승씨의 표정은 아직도 억울하다. 농사만 짓던 그를 연행하며 광주 화정동으로 가자고 운을 뗀 후 순순히 조사에 임하라는 은근한 압력 앞에서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문락성 . 양찬승 . 양동일(앞줄 좌로부터)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문락성 . 양찬승 . 양동일(앞줄 좌로부터)

 

동생이 간첩이라고 말하는 그들에 의해 심지어는 진술까지 강제 받았다. 농사를 지으며 맘 편하게 살겠다는 소박한 바람은 온갖 수모에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형사들이 들볶았고 피해가 가족들에게까지 전가돼 지금까지도 그 상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처는 그의 아들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중학교 1학년인가, 사복 입은 경찰들이 학교까지 찾아 왔어요. 그 길로 우리 집에 가서는 워커 발로 살림들 거둬버리고, 신 신고 방을 막 돌아 댕개요, 연속극에서 본 그런 행동들을 한 거여요.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앨범에 있는 작은아버지 사진도 다 빼 가 버렸고요, 그 뒤로도 쭉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감시당했어요. 밤나 나와서 성가시게 했어요, 작은아버지가 도망 댕길 때죠. 연좌제 때문에 조카인 나까지도 감시 대상이었던 거예요.”

양춘승의 조카 양동일(1964년생)씨는 어린 자신에게도 가차 없었던 당시 경찰들의 폭압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구둣발로 집안을 헤집고 다니던 그들의 표정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아직도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는 것일까? 이야기하는 내내 그의 어깨는 움츠러들었고 목소리는 가라앉으며 조용해졌다.

1996년 장흥문화원에서 발간한 『장평면지』 619쪽 ‘진산리’ 편을 보면, ‘마을의 주요 사건’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6.25사변 때 93호 전 가구가 소실되었다. 그 후 일월곡과 당곡의 마을은 폐촌 되었다. 진산, 두봉마을을 합해서 90명가량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 두 개의 마을이 폐촌 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고 90명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기록은 빈약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마을의 어르신들을 만나 묻고 또 물어 기억해내고 기록하는 것, 지금 우리가 있는 이유이다. (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마을사진:마동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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