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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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⑮
  • 장강뉴스
  • 승인 2022.04.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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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면 갈머리 큰애기가 겪은 한국전쟁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수몰되기 전 유치면 갈머리마을(송정1구), 왼쪽으로 유치초등학교가 보인다
수몰되기 전 유치면 갈머리마을(송정1구), 왼쪽으로 유치초등학교가 보인다

 

유치면 갈머리 큰애기가 겪은 한국전쟁

큰애기 문우순(1927년생)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다

문우순은 장흥댐 바로 언저리에 살고 있다. 평생 살았던 유치면 갈머리와 장터 소재지가 물에 잠긴 후 표고버섯 농장을 하는 아들과 산지가 20여년이 넘었다. 우순의 기억과 감정 속에는 지금도 물속에 잠긴 마을과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한국전쟁 전후, 그 어려웠던 시절을 얘기하는 우순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두려움과 서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목소리는 또렷했고 기억은 총총했다.

#장면1-갈머리 사장나무 아래서 벌어진 일

문우순이 태어나고 스무살 처녀 시절까지 살았던 갈머리 마을은 동구에 서있는 사장나무(당산나무)로 유명했다. 갈머리 마을은 보림사와 피재 넘어 장평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걸어서 다니던 6-70년대 지나가던 객들이 이 사장나무에서 꼭 쉬어가고는 했다.

유치 장터에서 돈을 사고 막걸리 한 잔 걸친 용문리, 봉덕리 산골사람들도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기 십상이었다. 보림사로 소풍가는 유치초등학교 학생들도 모두 갈머리 마을 앞을 걸어가고는 했기에 유치사람이라면 이 사장나무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거 휴전되기 전에, 그랑께 군인들이 요로끔 아조 오먼 경찰이고 군인이고 많이썩 오제, 아조 몇 백 명이 온가 몰라. 요 한 번은, 갈머리가 사장나무가 좋거든. 싸악 모아놓고, 인자 말하자먼 그때는 식구가 다 많이 산께, 큰 성, 작은 성 한 집이서 모도 결혼해갖꼬도 같이 살거든. 그라먼 느그 짝꿍을 맞치락 해. 그라먼 시숙된 냥반도 이녁 남편이 없으먼 남편이다, 지수(제수)도 말허자먼 내 각시가 나가고 없으먼.

아, 무선께 총소리만 나먼 피난을 가분께 있을 수가 없어~. 그라고 인자 밤에는 이러끔 짝꿍을 맞치고, 그랬는디 머리만 잔 엉성허게 나오고, 옷도 그. 아 시골사람들이 일만 허고 나와도 머리도 엉성하고 옷도 험상한디, 그때 피난 댕긴 사람들이 머시 옷이 깨끄럼(깨끗) 하것어. 그람 그 사람들도 쥑에불고(죽여버리고).

거시기 저 점옥이 마누래 친정 오빠. 그날 거그 또 부자(父子)에 하래에(하루에) 쥑에불고. 그 집이가 다 서울로 이사 가불었느디, 회전댁이라고 전에 있었거든. 그 집이도 그때로 해서, 아들이 고등학교 나왔어, 그때. 그래갖고 저그 저 갤혼(결혼)도 했고 그랬는디. 그때도 두 집이 죽어불고. 아조 먼 요렇게 짝꿍을 맞치다 말만 잔 잘못해도 끄고 나가서 쥑에불고. 머리만 잔 엉성허고 그랴도 그라고.”

갈머리 마을 사장나무
갈머리 마을 사장나무

 

#장면2-소를 끌고 온 군인들

어느 마을에 가서도 어른들을 만나면 한입으로 하는 이야기가 낮에는 군경에게, 밤에는 빨치산에게 닦달을 당했다는 것이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맞추려는 안간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한 마을 속에는 입산한 형제도 있고, 경찰이나 군인인 가족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소는 소중한 일꾼이자 엄청난 재산이었다. 하지만 빨치산이나 군경에게는 꼭 필요한 양식이었다. 빨치산이 산으로 소를 끌고 갔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군인이 어디선가 소를 끌고 왔다는 이야기는 드물게 듣는 터였다.

“그래갖고 인자 소를 끄고왔드라고 그래, 군인들이 수백 명이 옴시로. 소를 끄집어다가 사장나무에다 매놓고는 인자 물어보고, 거시기 하고는. 우리가 여그서 자고 갈 것인께, 우리 잠 잘 떼를 우리 아부지 보다가 말을 해 주라고, 우리 아부지도 거그 나가서 있었제. 그라먼은 쏘아서 총소리가 난께 다 내빼불고 없을 것이니, 학교 아니먼은 월천 그 강당(강성서원)에 거그밲이 없은께, 거리 가서 소를 잡어서 해주락 하드라고 그래. 그란께 인자 어디서 끄고 온지는 모르제.

인자 또 경찰들이 한 패 들오고, 군인들이 한 번쓱 오고 그라먼 아조 먼 아조 참말로 무스와서 풀잎이 떨어~. 그라고 나면 또 밤사람들이 달라들제. 해주라고 허먼 안 해줄 수가 없제, 안 주글란께 해주제. 그러고 또 경찰들이 오믄 그 집 수발을 해주라고 허먼 다 해주제.”

수몰 전 사장나무 아래 갈머리 사람들
수몰 전 사장나무 아래 갈머리 사람들

 

#장면3-억달(억새)을 이불 삼아 덮고 산 피난살이

한국전쟁 당시 유치사람들은 피난을 다니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문우순은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 특히 아이들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문우순은 산에서 젖떼기(젖을 떼어도 될 만큼 자란 아기) 하나에 쌍둥이 갓난아기 둘과 함께 피난을 하는 부부를 만난다. 인정이 많은 문우순은 갓난아기 하나를 맡아 품고 가는데, 총소리에 놀라 아기 부모와 길이 엇갈린다. 밤새 억달 속에서 아기를 돌보며 죽을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다.

“아 징해 피난 댕갰다는 말은 말 할 수가 없어. 시방은 방에서 불만 잔 안 때도 추운디. 그래갖고 한 번은 사흘을 굶고 산으로만 돌아 댕갰는디 밤이 닥치먼 멋을 덮으냐 그라먼, 어~ 억달(억새), 산에 가믄 억달 있어. 그놈을 요러끔(짚단 모양으로) 해갖고 그놈 속으로 들어가. 그래갖고 너도 대고 나도 대고, 춘지도 몰라.

그래갖고도 그람 모냐 내려간 사람, 못 내래가고 며칠 된 사람들 있제. 그래도 알드라고. 모냐 내래가갔고 밥이라도 싸갖고 오믄 준디 만날 안 넘어가서 못 묵것써야. 밥은 못 묵것는디 쌀은 준께 묵것드라고. 이깨서 깨묵은 게 묵거써야.

한국전쟁이 끝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집을 짓고 살아온 갈머리 사람들
한국전쟁이 끝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집을 짓고 살아온 갈머리 사람들

 

저 피난 가서 만났어. 어매 아부지가 다 죽어불고 쩌 이랬다그라고. 친정 오빠가, 말하자먼 좌익머리락 하제, 그 머리를 잔 썼는디 어찌끄럼 잡으러 댕긴께 동상 집으로 왔등갑드라고, 오빠 내외우기가. 그래갖고 거그서 산디 그 사람들 왔다고, 인자 말허자먼 동상 집이제. 동상 내외우를 다 쥑에분께, 세상에 아그들만 놔두고 다 쥑에분께. 그것들이 즈그 집이가 있을 때는 오글오글 살았제만은, 댔고 나왔제만은 어뜨끄럼 댔고 끄고 댕길 것이여.

즈그 누나, 머슴에드라고, 업고 댕기다 댕기다 얼마나... 애기는 00밑에다 놔두고 인자 남매가 나와부렀어, 서히(셋이) 가갔고. 그래갖고 그 애기를 놔두고 왔는디 살 것이여 죽어부럿제. 그런 일도 있어.

그래갖고 세상에 사람은 어서 만날지 몰라. 저그 나주서 한 번 만나봤당께. 애기 땡개분 것을. 아니 그란디 첨에는 얼굴도 모른께 몰랐제. 나도 에랬지마는 거그는 더 에리고. 몰랐는디 즈그까장 친정 이야그를 하고 동상 이야그를 하고, 그랑께 그 얘그를 하드라고. 그래갖고 그 여자는 결혼 해갖고 잘 살고. 피난 가서 모도 만난 사람이제.”

이후 갈머리 마을은 소개되고 한 집도 없이 불에 탔다. 문우순 가족은 장흥읍 남밖에(남외리)에서 갈머리 본가 헛간보다 못한 셋방을 얻어 살았다. 전쟁이 끝나자 가족들은 갈머리로 들어가지 않고 장터마을(유치면 소재지)에 집을 짓고 살았다. 문우순은 마지막으로 장흥댐이 들어서며 영영 고향마을을 잃어버린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인공 때도 불 다 질러불고, 없어 이 동네고 저 동네고. 쩌그 저 강안도(강원도) 불 난 쩍이여, 그러끔 숫꾸락(수저) 몽댕이 한나 없이 다 없어져불고. 인자 땅덩어리만 남었쓴게 그넘 보고 들어가서 살었제.

또 들와서 집 짓고 쪼깐 숨 쉬고 살만한께 또 쬐께나가고(쫓겨나가고). 인자 아조 못 들어가게. 그라고 땜을 막아서 갈라져논께 집안이 다 흩어져부렀어. 그랑께 유치사람들 같이 불쌍한 사람이 없어. 이북 사람들 엄마나(얼마나) 고향생각이 난가 몰것다. 나도 잊따가먼(잊을만하면) 어매매 시방도 거시기 거그 들와갖고 살라가먼 가자 하것다.”(글:(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사진:마동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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