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용서(容恕)와 베풂(布施)
상태바
장강칼럼 - 용서(容恕)와 베풂(布施)
  • 장강뉴스
  • 승인 2021.06.28 15: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일중 논설위원

모든 미덕중에 아낌없이 주는 마음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주는 것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많이 베풀어라. 그러면 똑같이 얻을 것이다.

최일중
최일중

받기만 하는 자에게는 명예가 주어지지 않는다. 명예는 베푸는 자에게 주어진 보상이다.

인도 속담에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지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했다.

생각만으로 아낌없이 줄 수 없다. 아낌없이 주는 행위는 생각이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것보다는 정확한 평가 방법이 없다면 그것은 분명 그 사람이 무언가 베푸는 것을 보고 판단하는 것보다는 정확한 평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사람이 무언가 베푸는 것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용서는 곧 사랑이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이다.

죄나 잘못한 말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을 뜻한다. 용서는 곧 자기 발전이다. 혹시 인간관계에서 배신(背信)을 당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배신을 당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관계에서 배신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나이 들어 진리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나이가 돼서야 그 배신의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제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부터는 제 자신에 대한 용서는 물론 상대방의 배신까지 용서하게 됐고 그 모든 미움마저 감사한 마음으로 돌렸다.

그리고 미운 놈 떡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오히려 더 배려하고 더 베푸는 정도가 됐다. 용서란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란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미운 감정이 쌓여가는 공격적인 마음을 가지고 복수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베풂이란 불가(佛家)에서는 보시(布施)라고도 말하는데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佛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이 보시는 육바라밀(六波羅密)의 제1 덕목이다. 그러니까 자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건없이 베푸는 것을 말한다. 이는 중생 구제를 목표로 하는 이타정신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보시를 행할 때는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그리고 베푸는 것도 모두가 본질적으로 공(空)한 것이므로 이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보시에도 세 가지가 있다.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이다.

재시는 능력에 따라 재물을 보시해 기쁨을 주는 것을 말하고, 법시는 진리를 구하는 자에게 아는 만큼의 불법을 설명해 수련을 돕는 것이며, 무외시는 어떤 사람이 공포에 빠졌을 때 어려움을 대신해 그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이 원망까지도 감사로 돌린 ‘산삼 도둑’이라는 글이 있어 전한다.

나무꾼 박 씨는 걱정이 태산이다. 혼기를 한참이나 넘긴 딸이 올해는 가겠지 했는데 또 한해가 속절없이 흘러 딸도 또 한 살 더 먹어 스물다섯이 됐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난 탓이다. 박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지만 세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바쁘다.

눈이 펄펄 오는 어느 날 그는 지게에 도끼와 톱을 얹고 산으로 갔다. 화력 좋은 굴참나무를 쫓아 헤메던 박씨는 갑자기 덜썩 주저앉았다. 새하얀 눈 위로 새빨간 산삼 열매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이 아닌가. 박씨가 백년 묵은산삼 한 뿌리를 캤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저잣거리의 약재상이 찾아왔다.

박씨는 약재상을 따라 저잣거리 주막으로 갔다. 천석꾼 부자 황참봉과 그의 수하들, 놀음꾼들, 껄렁패들도 산삼을 구경하려고 몰려 들었다.

마침내 박 씨가 보자기를 풀자. 일백년 생 동자 산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탄성을 지를 때 누군가 번개처럼 산삼을 낚아채더니 일 백년 묵은 동자삼을 개뼈다귀 같은 노름꾼 놈이 와그작 와그작 씹어먹는 것이 아닌가. 주막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황참봉의 수하들이 산삼 도둑의 멱살을 잡아 올려보니 폐병으로 콜록콜록하는 놀음쟁이 허골 이었다.

제대로 놀음판에 끼지도 못하고 뒷전에서 심부름이나 하고 고리나 뜯는 집도 절도 없는 젊은 놈팽이 허골은 코피가 터지고 입술은 부어오른 채 황참봉 수하들에 의해 방바닥에 구겨져 버렸다. “이놈의 배를 갈라 산삼을 끄집어 낼테다” 황참봉의 일갈에 허골은 사색(死色)이 됐다. 바로 그때 박 씨가 나섰다.

“황참봉 어른 아직까지 허골의 뱃속에 있는 산삼은 제 것이지요? 이놈의 배를 째든지 통째로 삶든지 제가 하겠습니다.” 박 씨는 허골을 데리고 나와 언덕마루에서 그를 풀어 줬다. 눈밭속으로 허골이 사라진 후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3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봄날 갓을 쓰고 비단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이가 넙죽 절을 하는게 아닌가. “소인, 허골입니다.” 피골이 상접했던 모습은 어디가고 얼굴에 살이 오르고 어깨가 떡벌어져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허골은 산삼을 먹고 폐병이 완치돼 마포 나루터에 진을 치고 장사판에 뛰어들어 거상(巨商)이 됐던 것이다.

꽃피고 새 우는 화창한 봄 날 허골과 박 씨 딸이 혼례를 올렸다. 박 씨는 더 이상 나무지게를 지지 않고 대궐 같은 기와집에 하인을 두고 살았다고 한다. 어떻습니까? 용서와 베푸는 마음이 남는 장사 아닌가요? 그렇다고 용서하고 베풀었다고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

. 복을 지으면서 알아주지 않은다고 한탄하면 오던 복도 달아난다. 복을 지으면서 칭찬을 받아 버리면 그 복의 반은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복을 지음이 부족함을 생각하고 더욱 지음이 부족함을 생각하고 더욱 원수를 용서하고 더 베푸는 사람이 되면 어떻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