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주인공 32-장흥읍 ‘92세 현역’ 김재열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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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주인공 32-장흥읍 ‘92세 현역’ 김재열 어르신
  • 조창구 기자
  • 승인 2020.10.12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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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열 어른신, 정년퇴임 후에도 꾸준하게 공부와 강의 활동 이어 오고 있어
‘92세 현역’…요즘도 봉사활동과 다양한 취미활동, 매일 매일 일기 작성해 와
김재열 위영남 어르신 부부
김재열 위영남 어르신 부부

정년을 맞고도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제2의 청춘을 보내고 있는 어르신이 있다.

외국어 능력과 속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낮추며 내세우는 것을 꺼리는 사람. 올해 92세인 장흥읍 연산리에 사는 김재열 어르신이다.

김재열 어르신은 지금도 12시 이전에는 잠을 안잔다고 한다. 지금도 매일 일기를 쓰고 중국어와 일본어 신문을 보고 에세이도 본다.

김 어르신은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 중국어에다 속기 능력과 그림그리기 실력도 상당하다. 취미생활로 즐기는 낚시와 수석, 분재, 목각, 도자기 제작도 하고 있다. 지금도 현역인 이유다.

김재열 어르신
김재열 어르신

김재열 어르신은 우리나라에 다문화교육이란 개념이 정립되기 전에 장흥군에서 다문화가정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교실을 처음 시작했다.

또한 노인대학 평생학습강사로 활동하는가 하면 교도소 교화위원으로도 30여년간 활동했다.

한글교실을 통해 다문화가정 주부들의 한국 정착을 도운 공적을 높이 사 2016년 제8회 교육과학기술부 평생학습대상에서 대상인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장흥의 문화와 역사와 관련 기여하기도 했다. ‘곳줄 고을 장흥’ 책 발간(1980년), 장흥군지

편집위원(1989년), 향교 전교(2008년)로 취임해 활동하기도 했다.

퇴직 전에 교직에 몸담았던 김재열 어르신은 1949년 21살부터 65세 교장 퇴임할 때까지 지역에서 많은 후학양성에 힘쓰며 열정적으로 활동해오셨다. 

김재열 어르신이 교직에 몸담게 된 것은 부친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재열 어르신
김재열 어르신

당시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교육입국을 위해 학교는 늘어나는데 교사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중졸의 학력에도 채용됐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미군정시기, 정부수립,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것은 불가피한 시대적 상황. 김재열 어르신은 당시를 갈피를 못잡는 선실없는 배를 탄 사람 같았다고 표현한다. 

1948년 3월 장흥남초 교사로 발령받아 첫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교사 재교육도 받고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일본어과목 수업시간에 집에서 철저하게 예습해 가 교직원앞에서 일본어로 답하니 다들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교사생활 틈틈이 농업, 잠업, 역사, 지구과학과목 등을 섭렵해 결국 교원시험에도 합격했다. 나이 50살에는 독한 마음을 먹고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했다.

각고의 노력과 우여곡절 끝에 졸업할 수 있었다. 

김재열 어르신
김재열 어르신

그러나 그것이 김재열 어르신의 배움의 전부가 아니었다. 72살에 남도대학 도자기학과 다니며 하고 싶고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분야를 채웠다.

왜 그토록 공부를 계속하시느냐는 물음에 “공부는 뚜껑 덮도록 해야 한다. 알아야겠기에...”하신다.

남들이 보기에 부러워 보이는 교사생활일지 모르지만 마냥 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많지않은 교사월급으로 외지로 학교 보내기는 여간 퍽퍽한 살림살이가 아니었다. 10남매 중 장남으로, 6남매의 아버지로 동생들과 자식들을 뒷바라지 하는 일이었으니....

한 때 생활이 어렵자 고민하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병아리 감별사가 되어 호주에 가서 돈을 벌어 보려고 공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감별이 끝난 병아리를 눈앞에서 기름통에 넣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생각을 접었다고 한다.

89세에 쓴 ‘선실없는 배’란 책에서 김재열 어르신은 “거친 바다가 세상이라면 부모님은 작은배였다.

설비도 없고 선실도 없는 배가 나를 지키는 전부이니 나는 모든 힘과 재주를 다하여 건너야 했다.

바다를 건너는 재주도 혼자 익혀야만 했으니 ‘고달픈 뱃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또한 못배움을 탓하지 않고 잡초처럼 자기 갱생을 위해 무던히 애썼다고 한다. 배움은 결국 울음이 웃음으로 변한 나의 생활이었다고 말한다.

김 어르신은 자신을 “아직도 모르는 것 너무 많고 못 배운 것 너무 많고 아직도 배우고 싶은 것 너무 많고 무식, 무능, 무명인이다”고 말한다.

능력과 지식이 많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평생 교사생활에다 교도소 교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재소자들을 보며 반면교사로 삼아 배운 삶의 지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재열 어르신의 큰 자랑거리라면 반듯하게 자라준 동생들과 자녀들, 손주들 외에 21살이던 1949년부터 지금까지 작성해오고 있는 일기장일 것 같다.

일기를 쓰기 위해 병원에 가서도 부탁해서라도 썼다. 일기를 쓰기 위해 세계여행도 다녔다.

그렇게 모아온 일기장만 1상자가 넘는다. 지금까지 일기를 안 쓴 날자는 6.25동란 중 특히 혼란했던 20여일뿐이라고.

오래 쓰다보니 습관이 돼서 자다가도 일어나서 쓰게 됐다. 그림을 곁들여 적어놓은 일기 중에는 혹여 애들이 볼까봐 속마음을 속기로 쓰거나 일본어, 중국어로 쓴 경우도 있다.    

아흔이 넘었지만 김재열 어르신의 총총한 기억력과 70년 넘게 기록해온 일기장이 만나면 장흥군의 근현대 역사 기록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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