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희노애락(喜怒哀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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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칼럼 - 희노애락(喜怒哀樂)
  • 장강뉴스
  • 승인 2020.08.3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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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중(논설위원)

이제 장마도 끝나고 코로나19도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코로나19 지역 감염이 급증하여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다.

최일중
최일중

희로애락은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을 뜻한다.

희노애락 등의 영위가 있기에 인간인 나 자신의 작용이 있다고 생각되며 반대로 인간인 나 자신의 작용이 있기에 그 희로애락의 영위가 행해지는 것 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참된 사실을 잘 파악한 것처럼 생각된다. 단 이것으로는 누가 그 피아의 상대적 관계를 성립시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는 참된 주재자는 피아 와는 달리 있다고 생각되는데 다만 그 조짐을 잡을 수가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작용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그 형상을 볼 수 없을 뿐이다.

따라서 참된 주재자가 실재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인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物)과는 달리 그것은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다.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며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신체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생존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선 인간의 신체 그 자체에 주재자가 존재하는지 어떤지부터 생각해보자.

인간에게는 백개의 뼈마디, 아흡개의 구멍, 여섯 개의 장기(臟器) 등 여러 가지 기관이 갖추어져 있다.

우리는 그 가운데 어느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길까. 자네는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유달리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리라.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모두 그에 대하여 늘 신하나 첩(妾)처럼 따르는 것일까.

모든 기관이 신하나 첩처럼 다른 것에 따르지만 한다면 서로 신체의 기능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러 기관이 서로 바꾸어 가며 주(主)도 되고 종(從)도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 기관 안에는 상주하는 주(主)가 있지 않고 결국 여러 기관을 통일하는 주재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 되리라.

인간의 신체에 그것이 있다는 필연적 사정을 알든 모르든 그것은 그 주재자가 있다고 하는 진실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인간은 일단 이 세상에 태어나 백개의 뼈마다 여섯 개의 내장 등을 갖춘 신체를 지니면 곧 죽지는 않는다 해도 머지 않아 다하여 없어지는 것이다.

신체는 세상의 물사(物事)에 몹시 부대끼고 시달려 그 없어져 가는 것이 마치 말이 달리듯 빠르며 누구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

피로해져 지치고 병들면서도 그 가는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이것은 슬프지 않다고 말하려 하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인간은 헛되이 죽는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의 마음도 이와 함께 다하여 끝난다. 이것을 큰 슬픔이라고 않으려 하는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산다는 것은 이 같이도 분명하지 않을 것일까. 혹은 우리들에게만 그렇고 인간 가운데에는 그렇지 않은자도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인간의 영위하는 일과 그것을 영위하는 자를 성립시키는 참된 주재자는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함을 제시하고 그것이 인간의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그것을 우선 인간에 있어서 가장 절실하고 구체적인 신체에서 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신체는 일정 불변한 주(主)가 없이 고생하며 다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에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존중하는 마음에서 구한다. 그러나 마음이야 말로 오류와 허위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결코 인간 존재의 주재자가 아님을 명백히 한다.

논술이 치밀하고 비통하여 그것만으로도 사색이 생각해진다. 유가에서는 맹자가 “사람에게는 모두 남에게 감출 수 없는 마음이 있다” 라고 말하고 순자(荀子)는 “마음은 형(形)의 군자다.

나이가 신명의주이다. 명령을 하고 명령을 받는 바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마음을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 하여 주체로 삼고 있다.

그런데 장자(莊子)는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그것은 오류와 허위를 범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주가 될 수 없는 것으로 했다.

오히려 마음에 있어서는 종이라 할 수 있는 신체를 맨 먼저 문제 삼고 있다는 것도 특징적이다.

물론 마음 안에서는 이른바 주재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사고방식은 유가보다 한층 근본적으로 개개 인간의 존재근거 그 자체를 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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