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도, ‘강진읍교회 · 강진농고’ 5·18사적지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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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 ‘강진읍교회 · 강진농고’ 5·18사적지 지정
  • 임순종 기자
  • 승인 2020.05.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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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교회, 시위대 본부 활용…조직적인 시위 및 항쟁 벌여
강진농고 500여명 학생들 교복 거꾸로 뒤집어 입고 항쟁 참여
강진의 오월항쟁 ‘청년과 학생’ 주요 축…민주화 열망 도화선
강진읍교회  /  강진농고(현, 전남생명과학고)
강진읍교회 / 강진농고(현, 전남생명과학고)

1980년 계엄군의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에 항의해 시위를 벌였던 강진읍교회, 강진농고(전남생명과학고) 등이 전남의 5·18사적지로 지정했다.

강진군은 그동안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 7곳에 안내판이나 표지석 등을 세워 관리해왔다.

강진버스여객터미널, 강진읍교회, 남도사우나(옛 남도장여관), 강진군청, 전남생명과학고(옛 강진농고), 강진청년회의소, 강진의료원 등 7곳을 공통양식의 표지석을 설치하여 그때를 기념하고 역사적인 장소로 보존하고 있다.

강진의 오월항쟁 역시 청년들이 주요 축을 이루었다.

강진지역의 5·18민중항쟁은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를 기점으로 광주를 빠져나온 시위대가 7~8대의 버스를 타고 강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시위대가 진입하자 경찰이 자진 철수하여 무력충돌은 없었으며, 이미 광주지역에서 자행된 참상을 알고 있던 수많은 군중들은 두려움과 분노에 치를 떨며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시위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먼저 자발적이고 조직적으로 항쟁에 참여한 이들은 청년과 학생들이었다.

강진 기독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시위대는 강진읍교회에 본부를 두고 여신도들이 지어준 밥을 먹고, 날이 저물면 강진읍교회와 남도장 여관에서 숙박을 하면서 버스터미널, 군청 앞 등지에서 상당히 조직적인 시위 및 항쟁을 벌였다.

여기에 강진농고(현, 전남생명과학고) 학생들과 지역 청년들, 청년회의소 회원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강진에서 시위가 절정에 달한 5월 23일 강진농고생 500여 명이 교복을 거꾸로 뒤집어입고 “계엄철폐”, “민주회복”, “김대중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또한, 지역청년, 청년회의소 회원들이 가세하여 시위가 절정에 달하였으며, 당시 도립병원(강진읍 남성리, 현 강진의료원)에서는 5월 23일 아침에 발생한 해남 우슬재 사건으로 부상 당한 총상자 2명과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5월 24일 시민군에 합류한 강진청년들이 장흥, 보성 등으로 진출하면서 강진은 시위가 종료됐다.

당시 강진에서는 강진농고생들의 시위로 교장이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강진에서의 시위는 상당히 격렬한 편이었음 에도 불구하고 항쟁과 관련한 구속자가 거의 없었다. 또한 시위 도중 부상자도 없었다.

이는 교회와 지역사회가 나서서 시위대를 안정적으로 지원한 결과 직접적인 무력충돌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진지역은 5·18 추모식 등을 통해 항쟁 이후에도 움직임을 이어갔다. 추모식을 처음 거행한 곳도 교회였다.

강진의 오월항쟁 속에서 청년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나 시위는 수많은 지역민들의 가슴에 불씨를 지피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강진과 장흥에는 고인이 되신 분들과 생존해 계신 5.18 민주 유공자로 강진에는 5.18 마지막 수배자 故윤한봉 선생을 비롯해 최남일, 오중원, 박영석, 김순학, 김영수, 김철현, 이호열, 손정일, 김재명, 김옥순, 박건수 선생 등이 있으며, 장흥에는 봉점수, 원종관, 조덕례, 김호연, 이창범, 정태수, 전용일, 김현채, 임병석, 김종연 선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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