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해신 농업전문가와 함께 떠나는 우즈베키스탄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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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해신 농업전문가와 함께 떠나는 우즈베키스탄⑦
  • 장강뉴스
  • 승인 2019.12.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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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해신(전, 장흥군농업기술센터소장) 농업전문가는 지난 2018년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 KOPIA 우즈베키스탄센터 농업전문가로 활동, 2019년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간 활동하며 한국이 그동안 축적한 농업기술 중 건조한 사막기후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우즈베키스탄에 전수했다.
 

제해신 농업전문가
제해신 농업전문가

2015년 KOPIA 케냐. 에디오피아센터 협력사업 기술자문으로 KOPIA 시범마을 영농상담 및 지도, 현장 기술지원, 민원처리 방법 자문,  KOPIA 센터 연구관리 지원 및  KOPIA 연구원과 간담회 등 활동했다.
2018년 KOPIA 우즈베키스탄센터 농업전문가로 시범마을 조성 사업 및 기술개발 보급, 우즈베키스탄 축산농가 농업인 대상 현지 기술지도 및 교육 담당, 우즈베키스탄의 농업기술 정보 수집․분석, 그 외 KOPIA 우즈베키스탄센터 소장이 정하는 업무 등을 맡아 활동했다.
‘농업한류’의 바람이 부는 우즈베키스탄에 대해 제해신 농업전문가에게 들어본다. / 편집자 주

고려인, 우리 민족 특유의 근면 성실…우즈베키스탄 사회에 성공적 뿌리내려

 

고려인 회장(빅토르 박)
고려인 회장(빅토르 박)

◇고려인 그리고 김병화 농장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구, 소련시절 스탈린의 이주정책에 따라 머나먼 이국의 땅으로 옮겨왔다.

고려인
고려인

소련 정부가 일본이 고려인 사회를 통해 극동에 간첩을 침투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사할린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으로 내몰았다. 그 수가 약 17만 명이었다고 한다.

고려인
고려인

고려인들은 제2차 대전 기간에는 적성 민족이라는 낙인 하에 거주이전의 자유 제한, 군복무 금지 등 불이익을 당하고 탄광 · 군수공장 등에서 혹독하게 노동하였다가 1956년 공민권 회복(고려인 등 11개 민족)했다.

고려인
고려인

우즈베키스탄 정착 고려인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우리 민족 특유의 근면성으로 김병화농장 등 다수의 콜호즈(집단농장)에서 생산성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노동영웅’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고려인
고려인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탸수켄트에는 ‘꾸일륙’이라는 명칭을 가진 전통시장이 있다. 이 시장은 916호 열차를 타고 머나먼 이곳까지 온 고려인들이 시장을 열었다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김병화 박물관
김병화 박물관

지금도 고려인 상인의 모습들을 볼수 있어 더욱 정감이 가는 시장이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몇 날 며칠에 걸쳐 이곳에 도착한 고려인들에게 빵과 물을 주면서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김병화 선생
김병화 선생

강인한 정신력과 명석한 머리를 가진 우리 민족 고려인들은 움막을 짓고 갈대로 우거진 황무지를 개척하여 쌀농사와 밀, 그리고 목화 재배를 하였다고 한다.

타슈켄트 인근에는 김병화 박물관이 있다. 소련으로 부터 노력영웅훈장을 2차례나 받은 김병화씨는 당시 고려인 집단농장의 농장장 이었다. 이곳으로 이주해 온 고려인들과 함께 집과 학교를 짓고 논과 밭을 만들어 작물을 재배하고, 목축(牧畜)을 시작하였다.

박물관 내부에 들어서면 김병화 농장장의 흉상과 함께 ‘우리는 이곳에서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는 글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특히 후학들의 교육에도 집중하여 러시아 등으로 유학을 가도록 권장하였다.

김병화 박물관 전시된 당시 김병화 농장 모습
김병화 박물관 전시된 당시 김병화 농장 모습
김병화 농장
김병화 농장
김병화 농장
김병화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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