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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깨어나라! 장흥인이여~
임순종 기자  |  momo66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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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09  11: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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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 없는 한일 경제전쟁 … 장흥군민들, 일본 아베정권 규탄
장흥인의 저력 보여줄 때…힘을 합치면 “반드시 이긴다” 확신

   
▲ 장흥군 사회단체 및 군민들이 아베 정권 규탄 현수막을 게첨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의병정신과 안중근 의사의 애국정신이 살아있는 ‘장흥군’

최근 한 달 동안 한일 갈등은 특정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국지전 양상에서 전면적인 경제전쟁으로의 확전을 향해 치닫는 상황으로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 안중근 의사

장흥군민들은 일본정부가 한국을 백색국가(수출심사 우대국 명단)에서 배제하는 시행령 개정안을 공포한데에 대해 강력 규탄하고 경제보복과 백색국가 제외에 당당히 맞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끝까지 벌일 것을 천명했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인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을 보호국화하고 통감정치를 실시한 일본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후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고 식민지화하려는 음모를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이 대한제국과 일본의 ‘강제병합안’을 성사시켰다. 이후 35년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제의 폭압과 착취를 당하게 되었다.

특히, 위안부, 강제징용 등 악행을 저지르고 현재까지 역사왜곡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2019년 대한민국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판결에 불복하며 오히려 한국의 첨단산업을 정밀 조준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 물품의 수출규제를 강화하여 경제보복의 제1탄 화이트리스트(안보를 위협하는 전략을 수출할 때 수출 허가 심사를 면제 해주는 국가명단) 한을 제외에 이어 제2탄 경제보복으로 대한민국 경제 파탄을 내려는 전략으로 내세웠다.

이에 대한민국 국민은 경제보복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 물건 사지 않기, 여행 가지 않기 등 범국민적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장흥군민 또한 이에 동참하고 있다.

올해로 광복 74주년을 맞이하는 장흥군은 의향1번지의 고장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동학농민 혁명의 성지로 최후의 격전지 ‘석대들 전투’를 벌인 곳이다.

또,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안중근 의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가고 있는 고장이다.

   
▲ 안중근 의사 위패와 영정이 보셔진 '장흥 해동사'

안중근 의사 성역화 사업 추진 배경에는 안중근 의사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국에 있지만 지난 1955년 장흥에 살던 유림과 순흥 안씨들이 안중근 의사의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나라에 건의해 장흥군 죽산 안씨 문중에서 장흥군 장동면 해동사에 안중근 의사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위령제를 지내며 안중근 의사의 애국정신과 평화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러시아 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는 순간 권총을 쐈다. 3발을 명중시켰다. 이후 일본군에 잡혀 1910년 3월 26일 중국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 안중근 의사 손

이처럼 안중근 의사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최후의 격전지 ‘석대들 전투’가 벌어진 곳이 장흥이다.

장흥군민과 향우들은 자긍심을 갖고 안중근 의사의 애국정신과 동학군의 의기를 펼쳐야 할 때다.

동학농민혁명은 미완(未完)의 혁명이지만 그들의 정신은 살아남아 근대민족민주운동의 본원(本源)으로 항일의병,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광화문촛불혁명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왔다.

이번 한일 경제전쟁에서는 동학군의 의기와 함성으로 미완의 혁명을 완성의 혁명으로 만들어야 할 때다.

동학농민혁명이 왜 일어났고 백성들은 왜 목숨을 바쳐야 했는지 그 정신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동학사상이란 ‘사람이 곧 하늘이다’ 동학농민군 4대 강령은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충효를 다해 제세안민 할 것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성도를 밝힐 것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해 권기를 모두 죽일 것.

1894년 음력1월 고부 농민 1차봉기 발생 녹두장군 전봉준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재물을 다 빼앗기고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지자 사발통문을 돌리고 수백명의 농민과 함께 고부관아를 점령한다.

농민군은 기세를 몰아 장성 황룡촌에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에 승리, 진주성 입성 한 후 정부와 전주화약을 체결했고 농민군의 위세가 두려웠던 조정은 왕비였던 민자경을 중심으로 한 민씨 세력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것이 일본을 자극하여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한 청나라 군사를 공격 한 후 인천에 주둔했다.

외국 군대가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된 전봉준 장군은 일본과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게 동학농민군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외국 군대가 들어오게 된 계기를 만들자 전봉준 장군은 휴전을 했다.

그해 9월 일본군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에 전봉준 장군은 다시 동학농민군 10만명으로 조일연합군과 전투를 치르지만 신식무기 앞에서 맥없이 무너진다. 이는 전투가 아닌 오히려 학살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 전투가 ‘우금치 전투’다.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한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가 모두 관군에 체포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결사 항전은 계속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격전지 장흥 석대들 전투다.

   
▲ 이방언 대접주. 이인환 대접주. 이사경 대접주. 최동린 소년장수. 이소사 여자동학군

장흥에서는 이방언, 이사경, 이인환 대접주 등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장흥으로 모여든 농민군은 의로운 뜻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인환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회령진성, 벽사역, 장령성, 강진현, 강진병영을 차례로 점령했다. 장흥부사로 있던 박헌양과 95명의 수성군이 죽었다.

   
▲ 장흥 석대들 전투

장령성 전투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22세의 여자 동학군 이소사와 13세의 소년 동학군 최동린이 지휘부로 참여해서 승리 했다는 점이다.

동학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나주성으로 진격 하였지만 나주에 있던 일본군은 장흥에 내려와 있었다.

12월 13일, 14일 동학농민군 3만여명과 650여명의 일본군, 관군과 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가 ‘장흥 석대들 전투’다. 동학군은 일본군의 신신무기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약 2000여명의 사상자가 넘었다고 한다.

동학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예양강(현, 탐진강) 강물도 붉은 색이었다고 한다.

다시는 탐진강이 붉게 물들지 않도록 장흥군민과 향우들이 깨어나야 할 때 이다.

일본경제 보복에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다는 대국민 성명에 발맞춰 광복 74회를 맞이하는 장흥군민으로서 제2의 독립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강력히 일본정부에 맞서야 한다.

의병정신으로 무장한 장흥군민과 향우들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줄 때가 왔다. 우리의 믿음이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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