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姓)씨 알아보기 7 - 곡부 공씨~선산 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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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姓)씨 알아보기 7 - 곡부 공씨~선산 곽씨
  • 장강뉴스
  • 승인 2018.12.2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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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중(한국성씨본존회 위원)

〈20〉 曲阜 孔氏(곡부 공씨)

始祖 孔紹(시조 공소)

공자를 도시조로 하는 곡부공씨 시조 공소의 원래 이름은 소(昭)이다. 그는 원나라 한림학사였으며 고려때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를 배종하여 귀화했으며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하고 희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희원은 창원의 옛 지명으로 본관을 창원으로 세계해 오다가 정조18년 문선왕의 고향인 곡부로 관향을 하사받아 그때부터 곡부를 본관으로 했다. 그리고 10세손 공인두가 중국에 건너가 성상을 모셔와 전남 고흥군 풍양면 상림리에 대성사를 설단하고 제향을 행하여 온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대 왕조를 통하여 명신, 명장과 현관, 석학 등이 많이 배출된 공씨는 곡부 단본으로 성인 공자의 후예이기 때문에 왕들도 곡부공씨를 특별히 우대했다. 따라서 곡부공씨의 도시조는 성인 공자이며 53세손 공완의 둘째 아들인 공소가 우리나라의 시조가 된다.

공려는 고려시대 집현전 태학사에 이어 평장사와 지응양군천우대장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공부는 서예가 일세를 풍미한 문장가로 한산군 이색 신도비를 위시한 많은 필적을 남겼으며 팔청지수로 추앙받은 태학사였다. 공부의 아우 공은은 우왕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했으나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역성혁명을 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며 이성계의 출사 권유를 거부하다가 전남 여천에 유배되어 세상을 다한 절신이다.

공윤항은 병조좌랑 승지를 역임하고 공성탄진연화를 저술했으며 공명렬은 중국절리지를 남겼다.

임진왜란때 권율 장군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왜군을 대파한 공시억도 공씨가문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청백리로 유명한 광국공신 공서린과 출천효자 공덕일, 공응조가 있고 한일합방 후 의병, 의열단, 임시정부 요인 등 항일독립운동가 또한 많다.

〈21〉金浦 公氏(김포 공씨)

始祖 公允포(시조 공윤포)

우리나라 김포공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의 명장인 공순영으로 전해오지만 선대는 중국 노나라 왕족의 후예인 공윤보이다. 그는 당나라 18학자의 한 사람으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신라 경덕왕 대 우리나라에 들어와 김포에 정착하면서 그 세계가 이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상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힐 길이 없어 후손들은 조선조 성종 때(계공랑 종7품, 문관직)인 공명례를 1세조로 하는 벽동파와 정승을 역임한 공의를 1세조로 하는 창원파, 공보연을 1세조로 하는 문천파로 나뉘어 있으나 김포를 관향으로 하고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공씨는 시조 27세손 조선시대 세조 때 불복지신으로 몰려 함경도 문천에 귀양을 가 세거하는 문천파와 조선 성종 때 김포천능 사건에 화를 입어 평안도 벽동으로 강제 이주당한 벽동파 그리고 경상도 함안에서 10대를 세거하다가 진사 공세권이 창원으로 옮겨 후손들이 정착 세거하게 된 창원파가 각각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포 공문은 구한말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공창준이 있는데 그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했고 상해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의 창당위원으로 활약했다.
▲인구: 서울 388, 경기 276, 강원 41, 충북 20, 충남 61, 대구 51, 부산 79, 경북 70, 경남 119, 전북 36, 전남 105, 제주 10  계 1,256

〈22〉鳳山 郭氏(봉산 곽씨)

始祖 未詳(미상)

봉산곽씨는 1976년 명진대동보를 편찬할 때 대종회의 의결로 현풍 곽씨로 통합했다.
봉산곽씨의 중시조로 알려져 있는 곽봉은 본래 현풍 곽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봉산곽씨는 현풍곽씨의 지파가 되는 셈이다.
봉산은 황해도에 위치하며 고구려의 휴양군이 명칭이었다. 후손으로는 곽봉의 아들 곽희조가 조선조 중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백천군수를 지냈다.
1985년 국세조사 때 전체 인구가 18명으로 나타나 있다.

〈23〉善山 郭氏(선산 곽씨)

始祖 郭佑賢(시조 곽우현)

고려 때 온청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 겸 태자첨서를 역임하고 선산군에 봉해진 곽우현을 시조로 하며 호는 서천이다. 선산곽씨는 신라 때 시중을 지낸 곽상을 시조로 하는 청주곽씨와는 계통을 달리한다.
곽씨의 선계는 중국 주나라 왕손인 곽목이며 고려 때 정의공 곽경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포산군에 봉해져 포산곽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선산곽씨는 제해보를 만들 때 포산곽씨와 합보하여 포산으로 본관을 통일시켰으나 그뒤 세계간의 연대차 간격이 크게 나타나 임인보 발간 때 서천공 곽우현을 시조로 다시 환원시켰고 1976년 병진대동보 편찬 때부터는 다시 현풍곽씨로 통합시켰다.
선산은 원래 신라 때는 일선군이 있었으며 고려 때는 선주자사로 고쳤으며 현종 때는 상주속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조에 들어와 다시 군으로 고쳐 선산군이 됐다. 주요 성씨로는 곽(郭), 김(金), 류(柳), 림(林), 문(文), 박(朴), 백(白)씨 등이 있다.
선산곽씨는 고려조에서 명신거경이 다수 배출된 명문이다. 삼사 좌윤의 벼슬에 있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충북 옥천의 구룡촌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곽수원, 문의현령으로 선정을 베푼 청백리 곽지겸,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조헌 장군의 휘하에서 큰 공을 세우고 순의한 곽자방과 그의 아버지 곽언, 효행으로 널리 세상에 알려져 존경받아 온 곽재항, 곽진우 및 그의 아들 곽필수 등은 선산곽씨가 자랑하는 인물들이다. 관로에서도 두드러진 인물이 많다. 곽대윤, 곽재흥은 성종 때 춘당시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검판으로 정조사를 수행 명나라를 다녀왔고 사헌부장평, 사간원 현남, 성균관 전적, 사헌부 장령과 집의를 역임한 청렴강직한 인물이다. 그는 외직으로 담양부사가 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배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인구: 서울 902, 경기 479, 강원 15, 충북 1,411, 충남 975, 대구 52, 경북 79, 경남 52, 부산 102, 전북 41, 전남 42, 제주 2  계 4,15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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