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姓)씨 알아보기 6 - 제주 고씨~용궁면천 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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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姓)씨 알아보기 6 - 제주 고씨~용궁면천 곡씨
  • 장강뉴스
  • 승인 2018.12.2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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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중(한국성씨본존회 위원)

〈18〉 濟州 高氏(제주 고씨)

始祖 高乙那(시조 고을나)

탐라개국 설화로 알려진 삼성혈 전설의 주인공인 고을나왕이 시조이다.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나왔는데 사는 곳에 따라 고을나가 일도, 양을나가 이도라 하고 부을나는 삼도라 이름짓고 고씨를 임금으로 한다는 기록이 태종 때 정이오가 지은 동문선에 수록된 성주고씨가전에 기록되어 있다.

고씨는 제주고씨 이외에도 여러 본관이 있으나 모두 제주고씨에서 분적된 계통이며 고을나를 도시조로 하고 46세 고맙노를 중시조로 한다.

그리고 1986년 계해보의 간행을 계기로 9개파가 대동단합하였다.

고려사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시조 고을나의 15세손인 고후, 고청, 고계가 신라 때 내도하였는 바 각각 성주, 왕자, 도내라는 칭호와 함께 탐라라는 국호도 받았다고 한다. 한편 고자겸의 태자 고말노가 고려 때 내도 고려 태조로부터 성주, 왕자의 칭호를 받았다.

제주고씨가 중앙정부에서 치사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이후부터 인 바 고려 때 9상서 12한림을 배출한 명문가로 성장했다.

고려는 5언시에 뛰어난 문장가로 정당문학 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를 역임했으며 고강은 병부상서 문하시중 좌복야를 역임했다.

고영선은 고아로 자랐는데 문종 때 등과했으며 산기상서가 되어 경상도의 수행을 규휼하여 큰 공로를 쌓았고 나중에 이 예부상서와 검교사공참지정사를 역임한 명신이다. 고경은 시부에 출중하여 당대의 문장가로 손꼽히는데 이부상서, 집현전태학사 문하시중을 역임했으며 익대원훈이 되었고 고용현은 충숙왕 때 출사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올랐으며 왜적방어의 공로로 은청광록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제주고씨는 더욱 빛나는 가문으로 발전했는 바 고득종은 외교에 능하고 제주지방의 유학진흥을 위해 큰 업적을 쌓았으며 예조참의 한성판윤, 동지중추원 부사를 역임했고 그의 장남 고대필은 전라와 황해도관찰사 첨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고여림은 성주고적의 아들인데 삼별초의 반란때 대장으로 순절한 공으로 고적이 제주의 유총관에 임명되었다.

대사성 고영중의 아들 고정은 원종때 출사하여 시독하사 좌복야 예빈윤 이부상서 문하시중을 지냈고 고백연 고중연 고재연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고백연의 아들 고경이 문층충파의 파조가 되었고 고중연의 아들 고합은 장흥백파의 파조가 되었으며 고계연의 아들 고인비는 화전군파의 파조가 되었다.

고대승은 세조때 문과에 급제하고 봉상시정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고여는 조선개국에 참여 개국공신삼등에 책록된 인물로 고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고형산은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해주목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병조, 호조, 형조, 이조, 공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렀다. 고희는 도총경력 훈련판관 군기첨정 및 여러 지방 군수, 부사를 역힘한 후 오위장에 올랐다

특히 장흥백파의 고경명은 제주고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중종때의 화가로 이름난 고운의 손자이며 대사간을 역임한 고맹영의 아들로 명종때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호조좌랑 정언 등을 거쳐 호당에 뽑혀 홍문관의 관교와 호당 부사를 역임하다 사직한 후 고향으로 내려갔다. 시(詩), 서(書), 화(畵)에도 뛰어난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 침입한 왜군과 싸우다가 둘째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하여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종군하지 않았던 그의 맏아들 고종후는 아버지가 전사하자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이라 칭하고 진주성 방어전에 참가 김천일, 최경희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는 바 이들 3인을 가리켜 진주3장사라 한다. 선조는 고경명에게 충렬공, 고종후에게는 효열공, 고인후에게는 의열공이란 시호를 내렸고 특히 고경명의 죽음을 슬퍼하여 광주에 사당을 짓게 하고 사액하였다.

양경공파 고사경은 고구려말과 조선초에 학자로 문명을 떨쳤고 고상안은 광해군 때에 울산판관을 지냈는데 농가월령가의 작가로 유명하였다.

조선조 중기의 시인인 고시언은 소대풍요를 저술하여 서민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구한말 망국의 한을 품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충간의담의 인물도 많았는 바 고지형은 기독교 장로로서 3.1운동때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사천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했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순국했고 고두환은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의 지교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독립단에 입단 후 국내특파원으로 활약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다가 구월산에서 일본경찰과 격전 끝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19〉 龍宮·沔川 曲氏(용궁면천 곡씨)

始祖 曲矜會(시조 곡긍회)

중국 용천 사람으로 고려 태조때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평찰을 지낸 곡궁회를 우리나라 곡씨의 1세조로 한다고 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증보문헌비고 도곡총설 등에도 곡씨가 보이며 1930년의 구중추원조사자료에도 곡씨가 나타나고 있다. 1985년 인구센서스에 곡씨가 서울 65명, 경기 22명, 전남 17명 등 전국에 분포되어 있고 총 18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곡씨의 상계는 실전되어 상고할 길이 없으나 현재 용궁과 면천으로 나뉘어져 있다. 용궁곡씨는 중국 당나라때 장군을 지낸 곡환과 송나라 신종때 통천인 곡진 등이 나타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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